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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ning

엄마 생일 @임정연

2017년 1월 20일 — 0

윤아는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내년 생일에도 꼭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다짐했다.

text 임정연 — illustration 왕조현

“엄마, 미역 어디에 있어?” “아, 미역? 냉동실에 있어. 그런데, 왜? 뭐 만들려고?” 어? 엄마가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라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아니, 아냐. 나 아무것도 안 만들어.” “정말?” “응, 정말. 나 정말 아무것도 안 만들 거야.” 전화기를 손에 쥔 채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 그렇구나. 미역은 냉동실에 있어. 멸치도 냉동실에 있고, 마늘은 냉장실, 참기름은 오른쪽 선반에 있어.” “응, 알았어.”

후유, 엄마가 눈치 못 챘다. 안 그래도 멸치랑 마늘은 어떻게 물어볼까 했는데. 얼른 냉동실 문을 열었다. 바로 미역과 멸치가 보였다. 미역과 멸치를 바닥에 놓고 냉장실 문을 열었다. 마늘이 바로 문 앞에 있었다. 마늘도 꺼내놓고 스마트폰에 메모한 미역국 끓이는 법을 열었다. “미역을 물에 불린다.” 스마트폰을 보며 큰 소리로 따라 읽었다. 식탁의자를 딛고 서서 선반에서 대접을 꺼냈다. 미역을 쏟아붓고 물을 받았다. 미역을 싱크대에 올려두고 내려와 스마트폰을 보았다. “냄비에 멸치 한 주먹을 넣고 물을 받아 30분 동안 끓인다.” 다시 큰 소리로 읽었다. 선반에서 냄비를 꺼내와 멸치를 한 주먹 넣었다. 싱크대에서 물을 받으려고 하는데 식탁의자가 높아 욕실의자를 가져왔다. 딛고 올라서서 물을 받았다. 오늘은 엄마 생일이다. 얼마 전 5살 내 생일에 엄마가 미역국을 끓여주면서 말했다. “우리, 윤아는 좋겠다. 생일에 맛있는 미역국도 먹고. 엄마는 끓여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때 엄마 생일에 내가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물이 가득 찬 냄비를 낑낑거리며 레인지에 올려놓았다. 물이 끓도록 인덕션 레인지의 버튼을 눌렀다. 외할머니가 쉽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왠지 으쓱해졌다. 의자에서 내려와 스마트폰의 메모를 보았다. “불린 미역을 참기름에 볶는다.”

대접의 미역을 만져보았다. 아직 딱딱했다. 그럼 그동안 잡채를 만들어야지. 다시 잡채 만드는 법을 찾았다. “당면을 물에 불린다.” 당면이 어디 있지 하고 냉장고를 열자 바로 보였다. 쓰기 쉽게 봉지도 뜯어져 있었다. 당면을 미역이 담긴 대접에 대보았다. 컸다. 대접으로는 당면을 불릴 수가 없었다. 당면을 안고 이쪽저쪽을 쳐다보다가 싱크대로 쫓아갔다. 아하, 여기서 불리면 되겠다. 욕실의자로 올라가 싱크대 구멍을 막고 수돗물을 틀었다. 당면을 집어넣고 내려와 스마트폰을 보았다. “시금치를 씻어 끓는 물에 잠깐 삶는다.”

어어? 하며 싱크대를 돌아보았다. 시금치를 씻어야 하는데…. 의자에 올라가 당면을 건져놓고 그 물에 시금치를 씻었다. 다 씻은 시금치를 건져내고 싱크대의 물을 뺐다. 다시 당면을 불렸다. 이제 시금치를 삶아야지. 냄비를 꺼내 들었다. 물을 받아야 하는데…. 의자를 딛고 올라가 냄비를 손에 들고 물을 받았다. 냄비가 점점 무거워지면서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냄비를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비틀거리며 물이 담긴 냄비를 겨우 레인지에 올렸다. 힘들다. “당근과 버섯은 씻어 채를 썬다.” 싱크대를 보며 한숨을 폭 쉬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당면을 다시 건져놓고 그 물에 당근과 버섯을 씻었다. 물을 빼고 나서 마개를 막고 다시 싱크대에 당면을 넣고 물을 틀었다. 도마를 꺼내 바닥에 놓고 당근과 버섯을 썰었다. 한참 당근을 써는데 바닥으로 물이 흘렀다. 뒤를 돌아보자 싱크대에서 물이 넘쳐흘렀다. 후다닥 의자에 올라가 물을 잠갔다. 그래도 싱크대를 타고 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당면도 같이 흘러내렸다. 바닥에 떨어진 당면을 주워 싱크대에 넣었다. 뒤에서 덜그럭덜그럭 하는 소리가 났다. 놀라 돌아보자 멸치 냄비에서 물이 넘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할머니, 할머니. 멸치 끓이는 냄비에서 물이 넘치면, 어떡해야 돼?” “윤아니? 물이 넘치면 냄비 뚜껑을 열거나 아님 불을 줄이면 되지.” “냄비 뚜껑?” 하며 손을 뻗다가 뜨거운 김에 쏘였다. “앗, 뜨거. 할머니 너무 뜨거워.” “뜨거우면 행주나 장갑 끼고 열어.” “행주? 장갑?” “장갑은 거기 옆에 걸려 있을 겨.” “아, 여기 있다.”
싱크대 옆에 걸려 있는 장갑을 끼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윤아야, 뭐 만들어?” “아니, 나 아무것도 안 만들어. 근데 할머니는 왜 내가 뭘 만든다고 하는 거야?” “아니, 그냥.” “할머니, 나 아무것도 안 만들어. 나 지금 바쁘니까 끊어.” 눈치챌까봐 얼른 전화를 끊었다. 의자에서 내려와 미역국 만드는 법을 찾았다. “30분 동안 끓인다.” 시계를 보았다. 엄마가 올 때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있다. 다시 바닥에서 당근과 버섯을 썰었다. 똑똑똑, 똑똑똑, 똑똑똑… 한참 썰고 있는데 엄마가 전화를 했다. “응, 엄마.” “엄마 일 끝났어. 금방 갈 거야.” “벌써?”

화들짝 놀라 시계를 보자 벌써 엄마의 퇴근 시간이었다. “엄마, 오늘 일 다 끝난 거야? 다른 일 없어?” “없는데. 왜? 윤아 뭐 하는 거 있어?” “아니. 나 아무것도 안 해.” “그래? 엄마 빨리 갈게.”

큰일 났다. 엄마가 온다는데 아직 아무것도 된 게 없다. 빨리해야 되는데. 미역국, 미역국. 레인지를 보자 멸치 냄비와 시금치 냄비가 끓고 있었다. 시금치를 끓는 물에 넣고 멸치 육수에서 멸치를 건지려고 했다. 두리번거리다 수저통에서 젓가락을 꺼내 멸치를 건졌다. 손이 뜨거웠다. 장갑을 낄까 하다가 젓가락질이 되지 않아 그냥 하나씩 하나씩 건졌다. 멸치를 건져내고 미역을 불린 대접을 보았다. 미역이 수북했다. 미역을 냄비에 붓자 육수가 넘쳤다. 어떡하지 하는데 넘친 육수에 당근과 버섯을 썰어놓은 도마가 떠내려갔다. 재빨리 도마를 싱크대 위로 올렸다. 양말이 젖어 축축했다. 하지만 갈아 신을 시간이 없었다. 다시 스마트폰을 보았다. “미역을 마늘과 같이 참기름에 볶는다.” 스마트폰과 미역국 냄비를 번갈아 보았다. 외할머니에게 또 전화를 했다. “할머니, 미역국의 미역 꼭 참기름에 볶아야 돼? 그냥 끓이면 안 돼?” “그냥 끓여도 되긴 돼. 대신 푹 끓여야지.” “그럼 그냥 끓이라고 하면 되잖아. 왜 참기름에 볶아야 한다고 했어?” 목소리가 울먹울먹 나왔다. “그게 맛있으니까. 윤아,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 없어.” 울먹이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잡채 해야지. 당면을 건져내었다.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아차, 시금치. 그제야 시금치가 생각났다. 시금치 냄비를 보자 푹 퍼져 있었다. 냄비를 들어내려다 뜨거워 놓치고 말았다. 시금치가 바닥에 와르르 쏟아졌다. 어떡해. 어떡해. 얼른 의자에서 내려와 냄비를 바로 놓고 뜨거운 시금치를 두 손으로 쓸어 담았다. 그때 도마 위의 당근과 버섯이 보였다. 볶아야 한다. 선반에서 프라이팬을 찾아 레인지에 올렸다. 버튼을 켜고 식용유를 부었다. 당근, 버섯을 넣자 기름이 튀었다. 뒤집어야 하는데.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꺼냈다. 뒤집었다. 기름이 튀어 뜨거웠다. 그래도 뒤집어야 하는데. 다시 뒤집으려고 하는데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멀리 있는 당근과 버섯에서 연기가 났다. 손을 뻗어도 숟가락이 닿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프라이팬을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아야. 엄마 왔어.” 그 소리에 놀라 프라이팬을 떨어뜨렸다. 돌아보자 엄마와 외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들어서고 있었다. “엄마.” 으앙 하고 울음이 터졌다. 엄마가 달려와 안아주었다. 씻고 나오자 식탁에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엄마가 식탁에 앉아 있고 할머니는 그릇에 미역국을 뜨고 있었다. “윤아야, 밥 먹자.” “응.”

식탁에 잡채와 다른 반찬들이 차려져 있었다. 미역국 대접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윤아야, 생일노래 불러야지.” 할머니가 날 보며 말했다.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노래를 불렀다. 엄마와 함께 촛불을 훅 불었다. 그러곤 미역국에 밥을 먹었다. 잡채도 맛있고 다른 반찬도 맛있었다. “이제 윤아가 다 컸네. 엄마 생일이라고 미역국 끓이고, 잡채도 하고.” “응. 내가 했어. 엄마 맛있어?” 으쓱하며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할머니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응. 맛있어. 엄마가 지금까지 먹은 것 중에 제일 맛있어. 내년에도 또 해줄 거지?” “응. 엄마. 내년에도, 그 내년에도 내가 미역국 꼭 끓여줄게.” 엄마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기분이 좋았다. 내년에도 꼭 해줘야지.

임정연은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소설집 <스끼다시 내 인생> <아웃>과 장편소설 <질러!>를 펴냈다. 최근 출간한 장편소설 <페어리랜드>는 2016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우수출판콘텐츠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