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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공감세상] 삭발과 상의탈의 / 이라영

등록 :2019-09-25 17:02수정 :2019-09-26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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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단식과 달리 삭발은 건강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머리카락은 어차피 다시 자란다. 그렇다면 삭발이 왜 투쟁에서 의미가 있을까. 삭발은 수행의 각오, 항거의 의미, 징계의 징표 등이었다. 특히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문화권에 있는 한국에서 삭발은 ‘몸을 깎는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을 지우고 오직 정치적인 몸이 되어 발화하기 위해 머리카락마저 잘라낸다.

자유한국당의 삭발은 단식투쟁을 조롱하는 폭식투쟁만큼 폭력적이진 않더라도, 삭발의 의미를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쓴웃음이 난다. 약자의 언어를 빼앗듯이 이들은 꾸준히 연좌농성, 삭발, 단식과 같은 투쟁의 언어를 집어삼킨다. 패션으로서의 삭발인지, 나름 미용적 측면을 고려하여 ‘빡빡’ 깎지는 않았다. 게리 올드먼과 율 브리너를 언급하며 서로 띄워주는 모습에는 웃음도 안 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삭발한 뒤 더욱 젊은 남성의 이미지를 얻었고 강한 남성성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스티브 잡스 흉내를 내느라 운동화에 면바지와 헤드셋 마이크까지 소품으로 갖추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가 연출하는 젊은 이미지에 비하면 전하는 메시지는 퇴행적인 반노동 정책일 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 어머니의 머리 모양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일종의 ‘향수’ 전략을 썼다면, 현재 자유한국당은 나름 젊은 이미지를 얻으려 몸부림친다. 나아가 삭발의 남성성은 나경원 원내대표의 삭발을 부추긴다. 특히 외모가 많이 언급되는 여성일수록 이 외모에 타격을 주려는 시선도 있는 법이다. 낄낄대며 나경원의 삭발에 관심이 쏠리는 모습도 불편하다.

여성의 삭발은 남성보다 훨씬 전복적이다. 1989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 촬영을 위해 강수연이 삭발했을 때 상당한 화제였다. 그는 ‘삭발 투혼’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평가받았다. 1995년 옥소리 역시 <카루나>에서 비구니 역을 위해 삭발했다. 머리를 밀며 그는 눈물을 쏟았다. 여성의 외적 아름다움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머리카락을 여성 배우가 모두 잘라낼 때 이는 ‘투혼’으로 바라본다.

여성의 삭발이 가지는 의미가 남성과 다르듯, 여성이 옷을 벗는 투쟁도 남성의 경우와 다르다.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체면을 만들어주는 의복을 걷어낸 몸으로 대항함으로써 희롱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여성의 몸을 투쟁의 몸으로 전환시킨다. 여성이 투쟁의 방식으로 옷을 벗을 때 그 몸은 가리는 몸이 아니라 두려움 없는 몸이 된다.

단식이나 상의 탈의는 그야말로 ‘가진 게 몸뚱이뿐’인 사람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이들의 언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몸 그 자체만이 발화도구가 된다. 이때 몸은 비유로서의 몸이 아니다. 머리를 밀고 곡기를 끊고 옷을 벗으며 온몸을 목소리로 전환시킨다. 더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몸을 투쟁의 도구이자 주체로 활용한다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 싫어서 몸을 활용했을 뿐이다.

거의 중년 여성으로 구성된 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이 점거농성 중 윗옷을 벗었을 때 역사의 시간은 43년 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돌아갔다. 1995년 출간된 신경숙의 <외딴방>에 등장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옷을 벗고 외치던 목소리도 들렸다. 2013년 밀양 송전탑 반대를 위해 옷을 벗은 고령의 여성들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대법원 판결까지 받은 합법적인 고용을 위해서도 여성들이 옷을 벗고 외쳐야 하는 상황을 ‘촛불’ 이후에도 보고 있다. 오늘날은 43년 전처럼 옷을 벗어던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뿌리진 않았으나 그 순간 카메라를 들이대며 히죽거리는 폭력적 눈이 있었다.

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은 원래의 위치에서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싶을 뿐이다. 사법부도 이들의 목소리가 옳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톨게이트 아줌마’들이 ‘정규직 시켜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줄 안다. 이 투쟁은 또다시 역사가 될 것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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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속 여성이 달라졌다

등록 :2019-05-13 18:37수정 :2019-05-13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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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광고, 20대 마른 체형 대신
진취적 여성의 꿈 응원하고…
남성성 강조한 스포츠 업계 광고도
치열하게 뛰는 여성들 앞세워

남성육아휴직·젊은 여성 사장 등
성 고정관념 깨는 광고도 잇달아
사진 오비맥주 제공, 나이키가 광고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유튜브 화면 갈무리.(그래픽_김지야)
사진 오비맥주 제공, 나이키가 광고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유튜브 화면 갈무리.(그래픽_김지야)

김서형이 맥주잔을 기울이며 과거를 되돌아본다.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겨웠던 1990년대, 티브이(TV) 광고 속 여성 샴푸 모델을 향해 쓴웃음을 짓던 그는 꿈을 좇기 시작한다. 20년 뒤 꿈을 이룬 친구 송은이, 김윤아와 함께 그는 노래를 부른다. “너라면 할 수 있어. 할 수가 있어. 그게 바로 너야~.”

14일 공개되는 티브이 맥주 광고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의 줄거리다. 벨기에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가 지난달부터 여성의 꿈을 응원하는 내용으로 진행하는 ‘비컴 언 아이콘’(Become an icon) 캠페인의 첫 광고다. 스텔라 아르투아를 수입하는 오비맥주 관계자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세 여성을 통해 진취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남성성이 짙은 포크록을 세 여성이 직접 부르고, 영국 출신 여성 감독이 촬영에도 참여했다”고 했다.

벨기에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의 새 광고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 왼쪽부터 방송인 송은이, 가수 김윤아, 배우 김서형. 오비맥주 제공
벨기에 맥주 ‘스텔라 아르투아’의 새 광고 ‘꿈은 단절되지 않는다’. 왼쪽부터 방송인 송은이, 가수 김윤아, 배우 김서형. 오비맥주 제공

최근 스포츠용품과 주류업계를 중심으로 진취적인 여성상을 앞세운 광고가 잇따른다. 지난 1월 말 나이키가 공개한 광고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는 유튜브에서 13일까지 1031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방송인 박나래, 가수 청하, 골프선수 박성현 등 치열하게 움직이는 여성들의 모습을 잇달아 비추고, 가수 보아의 내레이션으로 메시지를 전한다. “너 스스로를 믿을 때 네가 어디까지 갈지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거든. 넌 너만이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야.”

나이키가 지난 1월 공개한 광고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유튜브 화면 갈무리
나이키가 지난 1월 공개한 광고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유튜브 화면 갈무리
주로 20대 초·중반 마른 체형의 여성을 앞세우던 흐름이 달라지고 있다. 광고업계 관계자는 “남성성을 강조해온 스포츠·주류업계가 비교적 발 빠르게 변하고 있다. 페미니즘과 젠더 감수성이 높아진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패션업계 등에서 핵심 소비층으로 떠오른 밀레니얼 세대가 가치관에 따른 소비를 추구하고, 주류업계가 저도수 알코올 제품으로 여성 소비자를 공략하는 흐름이 반영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런 변화는 글로벌 브랜드가 주도하고 있지만, 일부 국내 기업에서도 차이가 감지된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남성육아휴직을 콘셉트로 한 그룹 홍보 광고를 시작했고, 삼성생명은 지난 3월 광고에 ‘젊은 여성 사장’ ‘육아휴직 낸 남성 사원’ 등 성 고정관념을 깨는 내용을 담았다.

다만 아직은 단발성 이벤트 수준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 광고업계 관계자는 “광고는 수익성과 직결되기 때문에, 혁신적인 메시지를 담아도 ‘돈’이 되지 않으면 공식 광고로는 연결되지 않는다”며 “광고주 쪽에서 먼저 페미니즘을 담은 광고를 요구하는 흐름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이수연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박사는 “보통 여성이 자신의 체형을 긍정하는 메시지를 담은 광고가 나오는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유명인에 기댄 기존 방식을 벗어나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한다”고 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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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 “남성은 강하고 성공해야 한다” 동의 안 해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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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 “남성은 강하고 성공해야 한다” 동의 안 해

등록 :2019-04-18 17:21수정 :2019-04-18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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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정책연구원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세미나
“20대 남성, 전통적인 남성성 거부”
“2명 중 1명 꼴로 미투운동, 낙태죄 폐지 지지”
18일 오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열린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세미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제공
18일 오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열린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세미나.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제공

강하고, 성공해야만 하고,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전통적인 남성성’을 20대 남성들이 거부하는 성향이 뚜렷하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18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여정원)에서 열린 ‘2019 변화하는 남성성을 분석한다’ 세미나에서 공개된 연구결과를 보면 “남자는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말아야 한다”, “가족의 생계책임은 남자가 져야 한다”, “남자는 무엇보다 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남성성에 대해 20대 남성이 동의하지 않는 비율(각각 62.6%, 41.3%, 62.6%)이 50대 남성(44.1%, 10.6%, 44.1%)보다 모두 20∼30%포인트 이상 높게 나타났다. 이번 연구는 지난해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전국 만 19세∼59세 남성 3000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마경희 여정원 정책연구실장은 “(이런 경향은) 성역할 규범이나 성별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개인’으로서 개성과 인격이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이상과도 다르지 않다”면서도 “20대 남성들은 다른 세대에 견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특히 높은데 이는 군 복무에 대한 부정적 인식, 디지털 세대로서 이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경험한 ‘젠더 전쟁’의 효과”라고 분석했다.

20대 남성 모두가 페미니즘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성평등 관련 현안에 관심을 갖고 지지하는 20대 남성도 다수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투’ 운동에 대한 20대 남성의 지지율은 44.9%, 낙태죄 폐지에 대한 지지율은 46.9%로, 2명 중 1명꼴로 지지의사를 밝혔다. 조영주 여정원 부연구위원은 “남성 4명 중 1명은 성평등 실현을 위한 캠페인에 참여 의사가 있고 페미니즘 교육에 관심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연구 결과를 보면 남성이 주도 하는 여성 차별 반대 운동인 ‘화이트리본 캠페인’ 참여의사는 34.2%, ‘히포시’ 캠페인 (He for She·성평등을 위한 남성의 참여를 촉구하는 UN캠페인) 참여 의사는 25.0%, 성매매 반대 캠페인은 33.3%로 나타났다.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참여 의사는 25.7%였다.

마 실장은 이번 연구결과를 토대로 “청년 남성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제도, 시스템, 문화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희생과 전통적 남성성을 강요하는 징병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밖에도 ‘여성을 보호하는 강하고 씩씩한 남자되기’를 권하는 교육과정과 상급자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직장 문화 개선이 필수적이라고 봤다.

김수아 서울대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이날 발표된 연구결과에 대해 “성평등 사회에 대한 상을 그리는데 남성을 참여시키고, 성평등이 남성과 여성의 개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라면서도 “남성의 불만을 정책 의제로 반영하면서 현재의 차별시정조치를 역차별로 개념화하는 것은 다른 맥락”이라고 지적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20대 남성들의 정치적, 문화적 보수성은 2008년 이명박 정부 때도 나타났다”고 짚으며 세대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신자유주의 경쟁사회 안에서 청년기를 보내야 하는 “사회적 불안정성”의 문제도 함께 봐야한다고 설명했다. ‘페미니즘’이 젊은 여성들에겐 시대적 불안을 견디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게 돕는 도구가 되지만, 반대로 또래 남성들에겐 이런 이론적 기반이 없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결국 여성학 교육을 확산하는 일이 핵심”이라며 “페미니즘은 여성과 남성 모두가 새로운 성별관계를 구성해갈 수 있도록 하는 이론적, 실천적 자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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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들 ‘페미니즘’ 반발 이유 최근에야 이해했죠”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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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여성

“20대 남성들 ‘페미니즘’ 반발 이유 최근에야 이해했죠”

등록 :2019-07-10 19:53수정 :2019-07-1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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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나윤경 원장
교육학과 여성학을 전공하고 2002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했던 나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원장이 지난 3일 서울 은평구 진흥로 원장실에서 취임 1돌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양성평등교육원 제공
교육학과 여성학을 전공하고 2002년부터 연세대 교수로 재직했던 나윤경 한국양성평등교육원장이 지난 3일 서울 은평구 진흥로 원장실에서 취임 1돌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한국양성평등교육원 제공
“시스템의 실패다.” 진단은 간명했다. 이른바 ‘20대 남성’으로 호명되는 이들은 왜 이렇게까지 페미니즘에 대해 격렬한 백래시(반발)를 보이는 것일까에 대한 답이다.

나윤경(54)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장은 지난 3일 인터뷰에서 “남성성이 학교 교육 현장에서 (잘 길러지도록) 제도적으로 편입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정해진 분량과 마감시한을 요구하는 ‘수행평가’를 예로 들며 “한국 사회가 시스템을 갖춰가면서 (평가기준 등이) 여성성에 더 부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 안에서 남성적인 특징은 소외되기 쉽다고 봤다.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교육방식이나 평가기준이 다양하지 않으니 “남자아이들에게 여자아이는 ‘우수한 존재’일 뿐이고, 여성 차별은 억지 주장처럼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걸 최근에야 이해하게 됐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장 처음 맡아 취임 1돌 맞아
“교육현장에서 남성성 특징 소외 받아
‘여성차별 주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
‘시스템 실패·기성세대 실수 탓’ 진단

설득 언어·성인지 콘텐츠 다양화 추진
유엔 ‘위민트레이닝센터’ 지부 유치 나서

그는 앞서 지난달 27일 열린 취임 1돌 기자간담회에서도 비슷한 진단을 내린 적이 있다.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다양성을 보장하거나 존중하는 대신 차별을 정당하게 여기는 사회가 된 것은 “시스템의 실패”이자 “기성세대의 실수”라고 했다. 그의 인식은 ‘양평원’ 누리집의 인사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사회는 실질적 민주화, 일상의 민주화, 관계의 민주화라는 또 다른 과제를 앞두고 있”고, “국가와 민족 등 거대 서사가 지운 개인적 차원의 정의로움, 관계 안에서의 정의로움에 대한 추구가 모두의 숙제”가 됐기 때문에 여성주의가 더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양평원’의 변화도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한다. 페미니즘에 반발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언어를 개발하고 이를 위한 성교육 콘텐츠를 다양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연세대 대학원 문화학협동과정과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교편을 오래 잡은 그이지만 공공기관은 처음이다. 여성가족부 산하기관인 ‘양평원’은 공무원에게 성인지 정책 교육을 하고 양성평등교육 전문강사를 양성한다. 나 원장이 지난해 6월 부임한 뒤엔 ‘맥락적 성인지 교육 콘텐츠’ 개발을 중점 사업으로 삼았다. 성희롱·성폭력은 어떤 개념인지 알려주는 일차원적인 교육 콘텐츠를 벗어나 연령이나 직군별로 다양한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그는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었다고 했다. 젠더 감수성이나 페미니즘과 관련해 여러 이슈가 터져나오는 시점인데도 성인지 교육은 늘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인지 교육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바뀌었잖아요. 사람들의 수준도 높아졌고요. 국·영·수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프로그램이 달라지는데 성인지 교육만 늘 개념 수준에 머무를 순 없잖아요.”

성인지 교육에 대한 이중적인 태도도 꼬집었다. 그는 “성인지 감수성을 가르친다는 건 ‘거짓말 하지 마라’라는 것과 똑같은 층위의 이야기이지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유독 이 분야에선 몰라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지식인들도 다르지 않다. “대학 교수들도 ‘나는 부엌에 들어가면 혼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사람이야’라며 (자신이)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죠. 그럼 이렇게 답해요. ‘교수인데 모르는 게 자랑스럽나요? 모르면 배우세요’라고요.”

“교육은 자신의 삶을 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나의 살갗에 닿는 것처럼 일상과 밀접하게 결합해야 한다는 얘기다. 콘텐츠 개발 과정에서 현장 교사나 군인을 직접 불러 함께 교육안을 만든 이유다. 모든 교과 수업 안에서 성인지 관점이 반영될 수 있도록 콘텐츠를 개발하는데 집중했다. 실제로 교사들이 참여해 ‘양평원’에서 만든 과학·진로교육안을 보면, 와이파이를 발명한 헤디 라머나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발명한 이희자씨 등 여성 과학자와 발명가를 함께 소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과학자는 주로 남성”이란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했다.

하반기엔 아시아의 젠더 트레이너(젠더교육 전문가) 40명을 초청해 유엔 여성기구와 함께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번 교육을 계기로 유엔 기구인 ‘위민 트레이닝 센터’의 아시아지부를 유치하는 것이 목표다. “서구 페미니즘 이론은 ‘고부갈등’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사실 한국이나 일본에선 이 문제를 빼고 여성주의를 실생활에서 실천하기 어렵죠. 유엔의 축적된 경험과 자료를 아시아권의 맥락에 맞게 만드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한국 페미니스트들의 활약상을 공유하고 아시아 여성들에게 축적된 여성주의적 활동과 지식·경험을 상호 교류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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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가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물은 것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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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여성

서지현 검사가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에게 물은 것

등록 :2019-04-28 12:12수정 :2019-04-28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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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검사-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 샤하브 아마디안 대담
주한 북유럽 대사관 공동주최한 토크쇼 함께 참석
“가부장제 안의 ‘남성성’이 남성을 억압해”
“페미니즘 통해 성평등 사회 이루면 남성에게도 좋을 것”
서지현 검사(오른쪽)와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인 샤하브 아마디안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대담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서지현 검사(오른쪽)와 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인 샤하브 아마디안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대담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둘은 서로를 향해 연신 “용감하다”고 했다. 한 명은 자신의 삶을 건 성폭력 고발에 대해 말하고, 다른 한 명은 페미니즘에 낯선 남성을 설득해 가는 도전에 대해 얘기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말에 잇따라 감탄사를 내뱉었다. 25일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만난 서지현 검사와 스웨덴의 남성 페미니스트 샤하브 아마디안 얘기다. 둘은 이날 덴마크·핀란드·노르웨이·스웨덴 등 주한 북유럽 대사관이 공동주최한 토크쇼 ‘노르드톡스’(NORD Talks)의 연사로 함께 참석했다.

아마디안은 비영리 페미니즘 단체 ‘맨’(MÄN)의 프로젝트 매니저다. 1993년 탄생한 이 남성단체는 같은 남성들에게 손을 내민다. 남성성이 가진 유해한 점을 바꾸려 노력하고 페미니즘을 알리며 성별에 기반해 발생하는 ‘젠더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활동한다. 상근자는 30명, 회원은 1500명에 이른다. 팟캐스트, 영화, 음악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남성들에게 긍정적인 롤모델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정부 지원금을 받아 저소득층이나 사회 취약계층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 접근법을 개발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유해한 남성성’이 무엇인지, 페미니즘과 성평등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성평등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90여분간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눴다. 처음 만났으나 동질감을 느끼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다. 서 검사는 “한국과도 정말 비슷하네요”라고 했고, 아마디안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가부장제는 전 세계적인 거니까요”라고 응수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최근 밝힌 연구결과를 보면 20대 남성 10명 중 6명이 “남성은 힘든 일을 내색하면 안 된다”거나 “남성은 일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등 ‘전통적인 남성성’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 남성들에겐 어떤 대안이 필요할까. 이 둘의 대화에서 그 답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서지현(이하 서) 활동하는 단체의 주요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디안(이하 아) ‘남성성’을 재정의하고, 남성을 ‘맨박스’(남성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고정관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남성성’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실 ‘완벽한 남자’가 되는 지침 같은 건 없다. 가부장 사회에선 임금이나 고용기회처럼 남성들이 얻는 것도 있지만 많은 것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거나 솔직하게 표현할 기회가 적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게 ‘유해한 남성성’이다. 이전에 기자생활을 하며 감옥의 재소자들을 취재한 적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드러내지 못해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털어놨다. 이런 남성성과 ‘맨박스’는 남성에게 억압을 가하는데, 이를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남성문화를 바꾸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아마디안은 “페미니즘은 남성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으로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부모님이 모두 이란 출신인 그는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 등 다양한 차별이 교차하는 지점에 페미니즘이 존재한다고 본다. 페미니즘이 기존의 권력구조를 해체함으로써 평등을 추구하고 인권을 보장해준다는 얘기다.

서지현 검사(왼쪽)와 샤하브 아마디안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성평등 사회에 대한 대담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서지현 검사(왼쪽)와 샤하브 아마디안이 25일 오후 서울 마포구 문화비축기지에서 성평등 사회에 대한 대담을 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최근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페미니즘에 반감을 가진다. 스웨덴에선 이런 ‘백래시’(반발)가 없었나.

사회구조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는지 고용, 승진, 임금 격차 등 수치와 통계를 보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나. 페미니즘은 무언가를 억압하는 개념이 아니다.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가진다는 건데, (기존 구조가 남성에게 유리하다 보니) 물론 현재 남성이 가지고 있는 몫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발전과정이라는, 긍정적인 면을 알았으면 좋겠다. 새로운 변화는 분명 남성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유해한 남성성’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스웨덴에도 ‘안티 페미니즘’은 있다. 그는 지난해 제2야당으로 부상한 ‘스웨덴민주당’의 예를 들었다. 우파 정당인 이 당은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스트 성향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아마디안은 하지만 “백래시 현상이 전적으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반발의 존재 자체가 “페미니즘 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방증”이라는 것이다. 그는 “페미니즘 현상 앞에서 남성들이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이런 남성을 설득하는 것이 같은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성이 나서서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나.

그렇다. 내 동료들만 봐도, 여성이 같은 이야기를 하면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 잘 안 듣는다. 반면 내가 이야기를 하면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여성들이 지난 150여년간 (여성운동을 통해) 그들만의 활동을 해왔다면, 남성들은 이제야 ‘유해한 남성성’을 자각하고 변화의 첫발을 뗀 셈이다.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한국 남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강하고 용기 있다’는 말의 의미를 비틀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나와 다른 비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이 ‘용기’이고 ‘강함’이다. “마음을 열고 용감해지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에도 ‘용기 있는 남성’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웃음)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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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시대 ‘비엘’ 논쟁 뜨거운 까닭은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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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시대 ‘비엘’ 논쟁 뜨거운 까닭은

등록 :2019-05-17 06:00수정 :2019-05-1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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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창작·향유하는 남성 성애물
“성별위계 반영…탈비엘하라” 논란
젠더 전복적 캐릭터 기대와 비판도
오른쪽은 국내 비엘로 인기가 높은 <드레스 코드>.
오른쪽은 국내 비엘로 인기가 높은 <드레스 코드>.
여성이 스스로 만들고 향유해온 ‘여성향’(女性向) 장르인 비엘(보이스 러브, 남성 간 성애물)이 논란과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펨)들이 비엘물을 거부하는 운동인 ‘탈비엘’을 주장하면서 찬반 논란이 벌어지는 등의 역동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팬덤을 만든 향유자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 논쟁이자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길항하는 하위문화의 성격을 보여준다.

비엘은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하이틴로맨스물의 유행 등 로맨스물에 대한 여성 독자의 선호, 욕망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분석된다. 80년대 이후 아마추어 만화동호회가 인기 만화 캐릭터들을 원하는 대로 각색하는 패러디를 시도했고, 이런 동인지문화 속에서 90년대 일본에서 유입된 ‘야오이’ 문화와 한국의 남성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한 ‘팬픽션’ 문화가 호응하며 여성이 즐기는 하위문화로 비엘이 정착했다. ‘동인녀’ ‘후조시’(썩은 여자라는 뜻의 일본어, 멸칭이자 자조적 명칭)라 일컬어진 여성 비엘 향유자들은 오랫동안 폐쇄적인 커뮤니티 중심으로 활동했다. ‘변태’적이고 ‘음란’한 남성간 성교 이야기를 그리거나 쓰고 읽는 여성은 비정상이라고 낙인 찍는 외부자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던 탓이다. 은밀하게 취향을 즐길 수 있는 모바일, 전자책 기술의 발전에 따라 2015년께 양지화한 ‘비엘 산업’은 최근 급성장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비엘 문화총괄서 <비엘 진화론>.
일본에서 출간된 비엘 문화총괄서 <비엘 진화론>.
<한겨레>가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등 주요 유통사들에 질문한 결과, 모두 전자책 시장에서 비엘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고 답했다. 알라딘의 경우, 전체 전자책 매출 대비 비엘 비중(소설+만화)이 2017년 7월 13%에서 2019년 2월 현재 30% 이상까지 높아졌다. 2018년 말 비엘의 매출성장률은 전년도 대비 126.2%로, 급성장했다. 알라딘 전자책팀 김진영 대리는 “비엘 장르가 전자책 시장에서는 메인스트림으로 합류했다는 점에 대해 이견이 없을 정도”라고 밝혔다. 예스24 역시 올해 전자책 매출 중 비엘 분야의 비중이 20%는 거뜬히 넘을 것으로 보인다. 교보문고의 경우, 비엘이 상업화되기 시작한 2015년과 2016년 각각 월평균 매출성장률이 213%와 211%로 급성장세를 보였다.

국내 만화 <오덕후 이야기-보통 연애, 다들 하고 계십니까>(한송이)의 한 장면.
국내 만화 <오덕후 이야기-보통 연애, 다들 하고 계십니까>(한송이)의 한 장면.
업계의 분석을 종합하면, 비엘물 최대 유통사라 할 수 있는 리디북스의 2018년 비엘 분야 예상 매출액만 2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리디북스 쪽은 관련 데이터를 일체 공개하지 않았지만 “업계가 매출 예상치를 조금 높게 잡는 것 같다”고 전했다. 2019년 5월 현재 리디북스에 등록된 비엘 소설 단행본 총 5915건 중 리뷰가 가장 많은 비엘 소설 <시맨틱 에러>에 달린 글은 1만2200여건이나 된다.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 공동학술회의 마지막 세션에서 발표된 ‘페미니즘 시대, 보이즈 러브의 의미를 다시 묻다: ‘탈BL’ 담론의 분석’은 250여명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사진 이유진 기자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 공동학술회의 마지막 세션에서 발표된 ‘페미니즘 시대, 보이즈 러브의 의미를 다시 묻다: ‘탈BL’ 담론의 분석’은 250여명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사진 이유진 기자
이런 가운데, 지난 11일 오후 한국여성문학학회와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인문한국(HK+)연구소가 서울 종로구 성균관대에서 연 공동학술회의에서 발표된 ‘페미니즘 시대, 보이즈러브(Boy’s Love)의 의미를 다시 묻다: ‘탈BL’ 담론의 분석’은 250여명 청중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 냈다.

한국·일본의 비엘 문화 연구를 천착해온 김효진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이날 “현재 비엘 비판과 비엘 옹호 모두 ‘페미니즘’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생물학적 여성’ 정체성을 중시하면서 ‘탈비엘’을 주장하는 ‘펨’들은, 비엘이 남자주인공만 등장하고 여성 캐릭터를 배제하는 남성중심적 서사라고 비판한다. 또한 남-남 주인공의 관계도 남녀의 섹스처럼 ‘삽입권력’을 가진 이가 성적으로 우위에 서는 재현구도를 만든다고 본다. 곧, ‘남성-강자-공’이 우위에 서고 ‘여성-약자-수’가 아래 위계를 점하는 식으로 현실 남녀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고 강화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탈비엘론자들은 비엘을 남성 숭배와 여성 타자화 또는 혐오의 장르로 평가하는 반면 비엘 옹호론자들은 비엘이 여성이 주체적으로 창작하고 향유해온 거의 유일한 장르라고 맞선다.

‘탈비엘’을 밝히는 사진. 트위터 화면 갈무리
‘탈비엘’을 밝히는 사진. 트위터 화면 갈무리
김 교수는 “10~20대 중심의 탈비엘론자들은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를 맞아 예전 자신이 봤던 비엘 책과 만화를 찢고 파괴한 뒤 ‘#탈비엘’ 태그를 달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게재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일부 탈비엘론자들이 “바람직한 여성서사로서 여-여 캐릭터가 등장하는 지엘(걸스 러브·GL)을 쓰라”는 등 비엘 작가를 압박해 작가가 법적 대처까지 천명하기도 했다는 데서 “비엘 작가들에 대한 공격이 페미니즘이란 이름으로 저질러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30년 전부터 한국 여성들이 열렬하게 받아들인 여성 중심 팬문화와 창작 문화라는 의의도 망각되고 있다”고 김 교수는 경계했다.

‘탈비엘’ 담론은 2000년대 이후 <왕의 남자> <후회하지 않아> 등 남성동성애를 테마로 한 영화 흥행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른바 ‘브로맨스’로 일컫는 남성 연대로 재현한 영화(“알탕영화”)만이 득세하고 여성 캐릭터가 삭제되는 흐름 속에 “한국의 후조시 문화가 결국 여성을 배제한 콘텐츠 양산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성찰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손희정 문화평론가(연세대 젠더연구소)는 “탈비엘은 ‘탈코’(‘꾸밈 노동’을 내려놓자는 ‘탈코르셋’ 운동) ‘탈혼’(결혼제도에서 벗어나기) ‘탈성애’(성애에서 벗어나기) 등 ‘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탈’운동의 한 흐름”이라 분석했다. 손 평론가가 <페미니즘 리부트>(2017)에서 제기한 주요 질문은 비엘 문화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한국 영화 또는 정당정치가 ‘브로맨스 코드’를 활용하면서 여성 팬덤을 이용하는 한편, 여성을 소외시키는 효과를 낳은 데 대한 문제제기였다는 것이다.

비엘의 하위장르 ‘오메가버스’를 다룬 작품.
비엘의 하위장르 ‘오메가버스’를 다룬 작품.
최근 비엘 구도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 능동과 수동(삽입/흡입)으로 동일시되던 남녀 성별 위계를 교란시키는 성격의 작품들도 늘고 있다. 이를테면 강한 여성성 캐릭터와 약한 남성성 캐릭터가 만나는 식이거나 임신·출산의 주체가 남성이 되는 식이다. ‘한국 BL 소설의 섹슈얼리티 연구: 오메가버스를 중심으로’(2018, 연세대대학원 국문학과 석사논문)를 쓴 이현지씨는 “최근엔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젠더적 제약을 남성체에게 전가하고 타자로서의 위치를 남성 캐릭터에게 전가하면서 남성성을 유희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또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비엘을 둘러싼 긴장이 생기고 있지만 ‘여성이 여성을 먹여 살리는 시장’인 이 여성 산업의 계보와 의미도 탐구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다양한 국내 비엘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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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혹은 쾌락, 잔인함, 남성성, 단눈치오

등록 :2019-01-04 06:00수정 :2019-01-04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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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낭만주의 젊은 시인으로 출발해
급진우파 선동가 된 단눈치오 평전
평화를 재앙으로 믿는 사람이 가진
예술적 재능의 대중적 파급력 보여줘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시인, 호색한, 전쟁광
루시 휴스핼릿 지음, 장문석 옮김/글항아리·4만2000원

“쾌락을 주는 그의 재능은 가히 악마적이다.” 민족주의 선동가이자 전쟁 영웅이며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였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에 대한 평가 중 하나다. 결사반대한 사람들조차 그에게 저항할 수 없는 매력이 있음을 인정했다.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저작들로 영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루시 휴스핼릿은 평전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로 2013년 새뮤얼 존슨상과 코스타북상, 더프 쿠퍼상을 수상했다. 휴스핼릿은 단눈치오가 신낭만주의 성향의 젊은 시인으로 출발해 민주주의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급진적 우파 선동가로 변모한 과정을 통해, 유럽의 지적, 사회적 삶에 깊이 뿌리내린(그래서 유럽 각국이 유럽연합(EU)이라는 공동체적 성격으로부터 이탈해 제각기 민족주의적 보수 정권을 탄생시키는 데까지 이른 현재를 숙고하게 돕는) 경향들을 탐색한다. 그 부활을 막기 위해 알아야 할 사실. 파시스트 운동들은 매력적이다.

단눈치오는 사후 강제로 파시스트로 '정렬'되었다. 단눈치오의 묘비 모습. 글항아리 제공
단눈치오는 사후 강제로 파시스트로 '정렬'되었다. 단눈치오의 묘비 모습. 글항아리 제공
오늘날 시인들은 소수의 독자에 읽히고 그 영향력은 문학에 한정된다. 단눈치오는 작가가 대중을 매혹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를 살았다. 단눈치오가 논쟁적인 시를 쓰면 이탈리아의 주요 일간지들은 1면을 미리 비워두고 시 전문을 게재했다. 휴스핼릿의 설명을 빌리면 단눈치오는 파시스트적이 아니었지만 파시즘은 단눈치오적이었다.

단눈치오의 일생은 거의 모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언제나 수첩을 휴대했고, 거기에 적힌 내용은 시와 편지, 소설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비행기가 대공포화를 피하는 가운데 끼적인 메모, 혹은 섹스 이튿날 쓴 편지 등은 믿을 수 없게 화려했던 어떤 삶을 기꺼이 들여다보게 한다. 1881년, 단눈치오는 학교를 졸업한 17살의 나이에 이미 평단의 호평을 받은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었는데 그때부터 자기 홍보의 달인이었다. 심지어 두 번째 시집 출간 직전에 자신의 거짓 죽음을 출판사에 익명 제보해 베스트셀러를 기획하기도 했다. 빚과 섹스 문제로 문제가 끊이지 않던 30대의 나이에 단눈치오는 놀랍지 않게도 니체의 저작과 바그너의 음악에 매료되었다. 감정의 거대한 분출.

2부 ‘물줄기들’은 단눈치오의 삶을 소챕터의 제목으로 차용한다. 아름다움, 엘리트주의, 순교, 질병, 데카당스, 피, 명성, 초인, 남성성, 웅변, 잔인함, 만화경, 전쟁의 개들. 탐미주의적인 극우주의자가 어떻게 삶을 만끽했는지를 격변의 20세기 초반을 무대로 보여준다. 1914년, 그가 50대에 접어들었을 때 사라예보에서 암살 사건이 발생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고, 독일도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단눈치오는 전쟁이 위대한 미래가 형성되는 도가니가 되리라 믿었고 예술은 더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1915년 2월, 단눈치오는 ‘라틴 문명의 방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에서 박학다식을 과시하며 이탈리아가 조만간 참전하리라는 확신을 청중에게 심어주었다. 점점 더 많은 이탈리아인이 단눈치오와 같은 생각을, 문명이 비옥해지려면 증오가 사랑 못지않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단눈치오는 정치를 안방으로 옮겨버려, 외설적이고 사적인 매혹으로 군중을 사로잡았다. “이탈리아는 그가 즐긴 수많은 여성 중 맨 마지막 대상이다.” 강령도, 진정한 열정도, 도덕적 책임감도 없다. 단눈치오는 ‘난장판’이라는 표현을 애용했다.

부사관 군복을 입고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는 장면을 연출한 단눈치오. 글항아리 제공
부사관 군복을 입고 병사들과 같이 식사하는 장면을 연출한 단눈치오. 글항아리 제공
1920년대에 이르면 무대는 무솔리니에게 넘어간다. 단눈치오는 세상을 버리고 있다. 이제 그는 무대 전면에서 사라지지만, 그의 이념과 말과 명성은 젊은 추종자들에 의해 이용당한다. 1938년에 단눈치오가 74살로 사망하자 그는 강제로 파시스트로 ‘정렬’되었다. “그의 영묘는 본질적으로 파시스트 기념물이다.”

<파시즘의 서곡, 단눈치오>는 두 명의 단눈치오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안전한’ 단눈치오는 자연과 신화를 서정적으로 노래했다. ‘위험한’ 단눈치오는 이탈리아인에게 세상을 피로 흠뻑 적시라고 요구하며 애국주의와 영광의 이상을 내세웠다. 예술가를 말할 때 그의 예술과 정치색을 분리해야 한다는 ‘안전한’ 예술사관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휴스핼릿은, 그 둘이 동일인으로부터 비롯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평화가 재앙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예술적 재능이 있을 때 그것이 어떤 대중적 파급력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는 한 인간의 삶.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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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미니즘의 뜨거운 주제 ‘남성성’

등록 :2018-11-01 19:37수정 :2018-11-02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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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는 페미니즘을 굳이 내세우고 있지 않지만, 지은이는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의견들은 대부분 페미니스트들의 것”이라고 밝힌다. “남자들이 한가하게 사무실 물통이나 들먹이고 있던 시간에, 페미니스트들은 이 남자들과 그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체제인 가부장제에 대해서 치열한 연구를 거듭해왔다.” 특히 남성성은 최근 페미니즘의 주된 연구 주제 가운데 하나이며, <한국, 남자> 역시 수많은 인용과 각주 등으로 앞선 성과에 기댄 흔적들을 남겨두고 있다.

영국 심리학자 코델리아 파인은 <젠더, 만들어진 성>(휴먼사이언스, 2014)을 통해 ‘과학’의 이름을 앞세워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뇌를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성차별을 사회문화적 ‘사실’로 만들어온 시도의 부적절함을 짚어냈다. 그는 이처럼 뇌과학, 신경과학으로 치장한 성차별을 ‘뉴로 섹시즘’(신경 성차별)이라 불렀다. ‘테스토스테론(남성호르몬)이 본질적인 성별 차이를 낳는다’는 신화를 논박한 후속작 <테스토스테론 렉스-남성성 신화의 종말>(딜라일라북스, 2018)도 올해 국내에서 출간된 바 있다.

<한국, 남자>에서 남성성 분석의 바탕이 되고 있는 ‘헤게모니적 남성성’ 개념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학자 래윈 코넬의 <남성성/들>(이매진, 2013)에 주로 기대고 있다. “헤게모니적 남성성이란 오늘날 이상적인 남성성으로 여겨지는 것들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투쟁과 동의, 전략의 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남성성이란, 가부장제와 남성 우위의 사회 체계를 지키기 위해 단순한 힘과 폭력이 아니라 법과 제도, 문화적 코드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압박하고 동의를 이끌어내는 전장에서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한국적 현실을 분석하는 데는 아무래도 그동안 한국 학자들이 다방면에서 펴온 연구들이 넓고 깊은 토양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한국, 남자>는 여성학자 권김현영을 비롯해 다수의 필자들이 쓴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8)와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현실을 인식하고 분석해나가는 방향에서 크게 공명하고 있다. 남성성 내부의 이질성을 드러내는 ‘식민지 남성성’과 같은 개념이나, 가부장제의 위기로 더이상 주체화할 수 없게 된 남성들이 온라인 공간을 중심으로 재주체화를 도모하는 현상에 대한 분석 등이 대표적이다.

최원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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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기 싫다, 고로 혐오한다’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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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나는 알기 싫다, 고로 혐오한다’

등록 :2019-03-29 06:01수정 :2019-03-3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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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반지성주의 흐름 분석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
반지성주의자 스스로 피해자로 여겨
“진지충·PC충 되길 마다 않고 싸워야”
타락한 저항-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이라영 지음/교유서가·1만3000원

‘장자연 사건’을 다룬 기사에 가장 흔히 달리는 댓글은 “여성단체는 대체 뭘 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2009년 사건 당시부터 여성단체들이 ‘진실을 밝히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라’고 줄기차게 외쳐왔다고, 누군가 댓글 형식으로 알려준다. 더욱 친절한 누군가는 지난 10년간 여성단체들이 이 사건과 관련해 활동한 이력을 한눈에 보여주는 신문기사들을 ‘증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잠잠해진 댓글창을 보면서 ‘오해가 풀렸나 보다’고 낙관하는 것도 잠시, 사건의 목격자인 윤지오씨가 여성단체와 함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는 기사에 이런 댓글이 주르르 달린다. “간만에 여성단체가 일 좀 했군요.” “이제라도 나서니 다행입니다.”

인터넷 검색을 1분만 해보면 알 수 있는 진실을 왜곡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다른 이들의 이야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게으르고 성급한 일부 네티즌의 오해’라고 지나치기엔, 매번 이런 식으로 불려나와 욕을 먹는 것이 ‘여성단체’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은가. 미세먼지가 심한 날마다 “환경운동단체는 대체 뭘 하느냐”고 핏대를 올리는 이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상황에 무지한 나머지 엉뚱한 과녁에 대고 분풀이를 한다고 여길 것이다. 여성단체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상황에 무지하기 때문에 같은 주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것일까. <타락한 저항>의 저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에 대해 “알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반지성주의자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쓰며, 모르지만 규정하려 한다.” 여성단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몰라서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전혀 알고 싶지 않으며 그저 ‘아무 일도 안 하는 단체’라고 규정하고 싶어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반지성적 면모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는 무지하기는커녕 지식이 풍부한 사람도 많다. 그 지식을 활용해 자신의 편견과 혐오를 논리적이고 이론적이며 과학적으로 포장한다. 저자는 “19세기까지 서구에서 과학과 성경을 바탕으로 흑인과 여성 일반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듯이, 오늘날 한국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에게 그 화살을 겨냥하면서 ‘합리적인 혐오’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이 역차별 받는다거나, 귀족노조 때문에 기업이 힘들다거나, 종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거나,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는 믿음”이 한국사회에 창궐하는 대표적인 반지성주의다. 반지성주의의 목표는 ‘기득권 유지’에 있다. 이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마녀’인 각종 ‘충’을 계속 만들어내고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반지성주의자들은 ‘모르고 싶어 하는 대상’을 언제나 비인간화하고, ‘이들과는 다른 나’를 확인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이라 느끼고 안도한다. 언제나 물리쳐야 할 ‘적’이 있으며 ‘내 편’이 아니면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폐’로 여긴다. 참으로 피곤한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맹렬한 혐오를 땔감으로 삼는 만큼 웬만하면 지치는 법이 없어 상대하는 사람들이 더욱 피곤하다는 게 함정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의 반지성주의자들이 자신을 ‘기득권자’로 여기기는커녕 한없이 가엾고 상처받은 약자로 여긴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원인을 ‘식민지 남성성’에서 찾는다. “식민지 남성성이란, 식민 지배국과의 관계에서 약자나 피해자가 된 남성이 자국 여성과 소수자를 억압해 남성성을 복원하고 유지하려는 의식”이다. “서구와 일본에 의해 ‘상처받은 피해자’가 된 이들은 서사를 장악하고, 기존 약자나 소수자의 새로운 움직임을 역차별이나 특권으로 받아들인다.” 스스로를 보편적이고 객관적이며 중립적 위치에 놓은 채 타인을 멋대로 지적하고 비난하는 ‘지배하는 피해자’가 이렇게 탄생했다.

2012년 4월8일 오후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팬들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채 ‘막말파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를 격려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2012년 4월8일 오후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 팬들이 서울광장을 가득 메운 채 ‘막말파문’으로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를 격려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저자는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 반지성주의의 흐름을 ‘블랙리스트’,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 등 세 가지 열쇳말로 풀어나간다. 반지성주의가 ‘알기를 거부하는 것’임을 상기할 때, 블랙리스트는 한국의 보수 우파, 나꼼수 현상은 중도 우파, 메갈리아는 진보 좌파 진영에서 나타난 반지성주의의 양상을 각각 보여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선 역대 보수 정권들의 문화정책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와 대중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해온 과정을 살펴본다. 나아가 우리가 이처럼 “시민으로서 표현과 자유에 관해 제대로 배우고 훈련할 기회가 드물었던” 까닭에 “금지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대신 금지당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행위를 통해 지배권력의 쾌감을 느끼는” 데 익숙해진 건 아닌지 반문한다.

또한 2011년 4월부터 이듬해 말까지 방송된 팟캐스트 <나꼼수>가 정치를 소비하는 새로운 대중적 플랫폼을 제시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나꼼수의 반지성적인 면모가 마초적 남성성과 결합해 성차별을 ‘자유롭게 민주화’하도록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보수 집권 10년간 ‘이기는 정치’를 갈망하던 이들은 ‘이명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과잉된 정의감을 느꼈고, 이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의제는 “나중에!”로 미뤄지고 수많은 혐오가 정당화됐다는 것이다.

최근 불거진 ‘메갈리아’ 논쟁에 대해서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벌어진 마녀사냥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서 ‘나를 설득해보라’고 말하는 진보 진영의 반지성적 태도를 꼬집는다.

<타락한 저항>의 저자 이라영은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가 혐오와 차별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 교유서가 제공
<타락한 저항>의 저자 이라영은 200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만연한 반지성주의가 혐오와 차별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진 교유서가 제공
‘지배하는 피해자’는 생각하는 인간과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면서 ‘개인의 취향’과 ‘표현의 자유’를 ‘혐오할 자유’로 대체한다. 그러나 “백인을 좋아하는 취향, 뚱뚱한 여자에 비위 상하는 취향,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취향”과 같이 상대가 선택할 수 없는 정체성을 공격하는 것은 결코 취향이 될 수 없으며 이런 혐오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고,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나아가 “반지성주의와의 싸움은 지배하는 그들이 조롱하는 ‘진지충’ 또는 ‘피시(PC)충’이 되길 마다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이미경 자유기고가 nanazaraz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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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체육계 미투를 다시 생각하며 / 정은 : 왜냐면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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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왜냐면

[왜냐면] 체육계 미투를 다시 생각하며 / 정은

등록 :2019-02-11 18:23수정 :2019-02-11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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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토론토 퀸스대학 박사과정(스포츠젠더 전공)

체육계에서 미투 움직임이 뜨겁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기간이 아닌데도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 체육 관련 단어가 이렇게 많이 올라온 적이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공분하며 이번 기회에 체육계가 완전히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앞다퉈 대한민국 엘리트 스포츠의 성적 지상주의, 폐쇄적 선수 양성 문화, 코치와 선수 간 수직적 상하 복종 관계 등을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그러나 이러한 성폭력 사건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이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은 10년, 20년 전과 같다. 현재 논의들이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체육계에서 폭력은 선수들의 경기력을 향상시키고 기강을 다잡는 데 쓰이는 전근대적 인권탄압식 코칭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성폭력은 어떨까? 성폭력을 저지른 체육계 인사 가운데, ‘성적을 올리려고 성추행 또는 성폭력을 저질렀습니다’ 또는 ‘선수들 정신이 해이해져서 성적 모욕을 하고 마사지를 시키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성폭력은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과 성폭력은 다르게 접근되어야 한다. 성폭력은 선수들의 경기력이나 기강과는 별개로 즉, 체육과는 관련 없이 일어나는 문제다. 성폭력과 폭력을 나란히 놓고 원인 분석을 하는 것은 ‘성’과 ‘여성’이 논의에서 탈각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체육계 성폭력 문제의 본질은 체육의 특수성 때문이 아닌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 때문이다. 즉 ‘남성과 여성 간 힘의 불균형’이 문제인 것이다. ‘체육이 남성적’이라는 말은 진부하게 느껴질 정도로 매우 당연한 사실이 돼버렸다. 체육의 남성중심적 구조와 문화를 해체하려는 노력이 더뎠던 만큼 헤게모니적 남성성과 성별 간 권력 구조는 공고히 자리 잡았다. 그렇게 체육은 여성이 성폭력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되고 남성의 성적 폭력을 용인하는 ‘강간문화’, 남성이 남성답게 공격적으로 경쟁하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도록 만드는 ‘위해한 남성성’, 그리고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성적 도구로 통제하려는 ‘여성혐오’로 잠식돼왔다.

물론 대한민국 체육계 구조는 이러한 남성성의 파괴적인 요소가 더 퍼져나가도록 방조해왔다. 그러나 성폭력의 근본적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폐쇄적 승리 지상주의’의 체육 구조는 ‘남녀 불평등’의 젠더 구조가 존속하고 은폐될 수 있게 도와주는 구실을 해왔을 뿐이다. 체육계 성폭력은 ‘갑’의 위치에 나이가 많고 권력을 지닌 남성 코치가, ‘을’의 위치에 나이가 어리고 권력이 없는 여성 선수가 위치하여 불평등한 젠더 권력 구조가 형성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여성 선수의 몸은 남성 코치의 성적 욕구를 채워줄 사물, 자신의 남성성에 도전하지 못하게 예속시켜야 하는 대상, 성적 자기결정권이 박탈되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대한체육회는 여성 부촌장과 훈련관리관 채용을 해결책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체육계 결정권을 가진 자리에 여성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대한체육회의 여성체육위원회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여 여성이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여성 부촌장은 단순한 상징에 불과하다. 여성 체육지도자는 채용과정에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지도과정에서 수많은 편견과 불평등과 싸워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체육 구조만을 바꾸는 것은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체육계 성폭력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기 위해서는 기존 체육계의 젠더 구조를 해체하는 작업도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체육 정책을 마련하고 추진하는 모든 과정에서 젠더 영향을 분석해 성평등성을 높이는 ‘성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전략이 필요하다. 체육 정책 전반에서 성적 규율과 규범 해체를 목표로 하는 인식 전환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작업이 이뤄지지 않으면 체육계 성폭력은 지속될 것이다. 학교에서 체육교사가 학생에게, 지역사회 체육관에서 스포츠클럽 지도자가 구성원에게, 선수촌에서 국가대표 감독이 선수에게, 언제든지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문제다. 조재범 사건은 체육계에만 일어나는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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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이후’에야 비로소 남자도 제자리를 찾고 있어요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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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사회일반

‘페미니즘 이후’에야 비로소 남자도 제자리를 찾고 있어요

등록 :2018-11-25 09:47수정 :2018-11-25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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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요조·오은의 요즘은
<한국, 남자> 펴낸 최태섭 작가

학교·또래 등 ‘집단’에 불편해하며
혼자 게임 몰두하다 인터넷에 관심
온라인에서 과잉 대표되는 남성과
그들 언어·논리체계 주목한 연구자

조선 후기부터 분석한 ‘한국 남자’
권력에 휘둘리며 국가·군대에 동원
식민통치부터 신자유주의 시대 건너며
가부장 지위 흔들리자 ‘억울함’ 쌓여
최근 <한국, 남자>를 펴낸 최태섭 작가가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최근 <한국, 남자>를 펴낸 최태섭 작가가 지난 1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앞에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일본의 현대미술가이자 소설가인 아카세가와 겐페이는 <나라는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거울 보기를 불편해하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울 속에 있는 사람은 나 자신 같지만, 다른 사람이다. 나 자신은 이쪽에만 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사람은 자신이지만 그 자신이라는 사람이 나를 보는 게 싫다’고 말하며 이런 내가 이상하냐고 묻는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기분을 아예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납득하지 못하는 모습의 내가 거울 속에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걸레’라고 불린 나, ‘창녀’라고 불리던 나였다. 어떤 연애를 하면서 나는 당시 상대에게 툭하면 걸레 혹은 창녀라는 소리를 들었다. 공연 전 무대용 메이크업을 한 김에 찍은 셀카를 에스엔에스(SNS)에 올렸다고 창녀가 됐고, 어느 모임에서 누구에게나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걸레가 되었다. 연애로 묶인 관계를 벗어나서도 내가 아닌 나는 빈번하게 거울 속에 있었다. ‘된장녀’라고 불리는 내가 있기도 했고 ‘김치녀’라고 불리는 나도 있었다. 아마도 내가 운전을 하게 된다면 거울 속에서 ‘김여사’를 볼 수도 있다.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거울 속에 ‘맘충’이 있을까 봐 매일 노심초사할 것이다. 지금은 웃으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 나는 나를 향해 너무 간단하게 쏟아지던 그런 무지막지한 호칭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매번 떨었다. 분노와 수치가 부른 오한이었으나, 그렇게 덜덜 떠는 중에도 내가 본의 아니게 빌미를 제공했을지 모른다며 거울 속의 나를 검열하느라 부지런을 떨었다. 생각해보면 그게 더 슬픈 일이었다.

최태섭 저 <한국, 남자>
최태섭 저 <한국, 남자>
어떤 단어가 있다. 2015년에 생겨 이제 3년차가 되었다. ‘된장녀’ ‘김치녀’ ‘메갈년’ ‘보슬아치’ 같은 숱한 여성 비하어의 ‘미러링’으로 등장했다. 현재는 한국 남성 전반을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회학 연구자 최태섭 작가(이하 호칭 생략)가 지난 10월 말 출간한 신간 제목은 <한국, 남자>다.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란 부제가 책 앞표지에서, ‘근현대사와 팩트를 토대로 분석한 한국 남자들의 기원과 현주소’란 문장이 뒤표지에서 책의 내용을 설명한다.

제목을 보면 자연스럽게 ‘문제의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논란을 타고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지금-여기 젠더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남성성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책 소개 기사들마다 악플이 주르륵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꼼꼼히 읽은 다음 가장 대표적인 반응 세가지를 뽑아 들고 그를 만났다(11월14일 한겨레신문사). 악플들이 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악플의 질문들

① 여자라는 이유로 (여러) 의무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누리면서 군대 끌려가서 헌신한 사람들 군복무 가산점 주자니까 그걸 특혜라고 한다. 3디(D)업종 비율도 남성이 월등히 높은데 임금이 일대일이길 바라면 뭘 어떻게 해줘야 하나.

“병역 의무를 남자에게만 부여한 주체는 여성이 아닙니다. 그걸 왜 여성들에게 따지는 건가요. 국가에 따져야 하죠. 만약 국가를 상대로 이 부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다면 전 동참할 마음이 있습니다. 게다가 사병 월급 인상하거나 군 인권 개선하겠다고 하면 ‘그게 군대냐, 더 빡세게 굴리라’며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집단이 예비역들입니다. 군 처우 개선에 반대하면서 여성들에게는 군가산점으로 핏대를 세우고. 논리적이지 않지요. 요즘 공무원 시험 보시는 분이 얼마나 많은가요. 당연하게도 만점자도 상당할 텐데요. 그 상황에서 군가산점을 준다는 것은 군대에 갈 수 없는 여성뿐 아니라 장애인들에게도 차별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남성이 군대 다녀온 노고를 인정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3디업종에도 막상 따져보면 남성이 월등히 많지 않습니다. 공사 현장이나 건설업 같은 데는 남성이 많겠지만, 청소업체 같은 쪽으로는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저임금의 노동을 하는 분들의 상당수가 여성입니다.”

② 여성가족부와 여성단체들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현실이다. 남성들에게는 남성가족부도 없고 남성단체도 없다. 혜화역 시위처럼 사람을 모아서 남성 차별에 대해 낼 소리조차 없다.

“여성단체는요, 국가 지원을 일부 받는 곳들도 있겠지만 보통 회원들이 낸 후원금으로 운영됩니다. 저도 여가부에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여가부는 전체 장관급 부처 중에서 가장 예산이 적습니다. 이번에 ‘획기적으로’ 늘었다는데 전체 국가 예산 470조원 가운데 고작 1조원이에요. 그마저도 상당 부분이 가족 정책 쪽에 쓰이고 여성 정책에 사용되는 돈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국가가 남성들을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잖아요. ‘남성부가 없어 불평등하다’는 식의 화법을 빌리자면 (한국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운영돼온 현실에 비춰 볼 때) 여가부 빼고 나머지는 다 남성부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성들의 혜화역 시위와 달리 남자들은 낼 소리조차 없다니요. 소리 내시지 않았습니까. ‘곰탕집 성추행 사건’(2017년 11월 대전의 한 곰탕집에서 한 남성이 여성의 신체를 만진 혐의로 실형 선고받음) 유죄 판결에 항의하는 집회(지난 10월27일)도 하셨잖아요.”

③ 남녀 갈등 조장하지 말라.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돕고 그래야지.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언제까지 싸우기만 할 거냐.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불평등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이 불평등을 무시하고 당장 마음만 먹으면 우리가 잘 지낼 수 있다고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부자들이 돈으로 갑질하고 차별하는 데 분노하듯이, 여성들이 받는 불평등한 차별에 문제제기하는 것입니다. 둘은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최태섭 작가(왼쪽)와 요조씨가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며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최태섭 작가(왼쪽)와 요조씨가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나 인터뷰를 하며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질문들에 담담하게 답하며 최태섭은 작은 한숨을 쉬었다.

“댓글 반응들이 10년 전과 똑같아요.”

―10년 전요?

“욕먹은 지 좀 됐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에 대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게 2006년인데요. 제가 쓴 글 분량의 최소 다섯배의 악플이 달렸었죠. 어떤 사람은 저한테 ‘된장녀 자가진단 테스트’를 메일로 보내주기도 했어요.(웃음)”

2006년이면 그가 23살이었을 때다. 대학 교양과목으로 수강한 여성학 수업에서 페미니즘 책들을 접한 그는 책 속의 말들이 다 맞는 이야기여서 남성으로서 반감이나 저항감이 없었다고 했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동이 아직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가 가장 여러번 읽은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이다.

―그 어려운 책을…. 저는 읽을 엄두도 못 내는 책인데요.

“너무 이해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역자 강연에도 가고, 해설서도 샀어요. 때마침 대학원 수업에서 한 학기 동안 같이 읽자고 해서 연관 텍스트를 찾아가며 정말 열심히 읽었죠.”

―‘학생 최태섭’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꼬맹이 때는 말 많고 인사 잘하는 애였는데 학교는 싫어했어요. 초·중·고등학교 모두요. 꾸역꾸역 다 다녔지만 안 다닐 수 있다면 안 다니고 싶었어요. 기본적으로 집단이 우선되는 공간을 불편해했던 것 같아요. 폭력을 겪을 때도 싫었고요. 중학교 때 술에 취한 남자 도덕 선생님이 죽도인지 목검인지를 들고 복도에 있는 모든 애를 영화에서처럼 때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술에 취한’이란 말과 ‘도덕 선생님’이라는 말이 이렇게 만날 수도 있네요.(웃음) 그럼 주로 뭘 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혼자 놀았던 것 같아요. 인터넷에서 동호회 찾아다니며 놀고. (어떤 동호회요?) 좀 부끄러운데요. 고등학교 때는 힙합. (힙합이 왜요? 저도 힙합 좋아했는데.) 동호회 활동 할 때는 공연도 했지만 20대 이후로는 끊었어요.(웃음)”

학창시절 최태섭은 게임에 몰두했다. 공부에도, 교복을 늘리고 줄이며 멋을 부리는 일에도, 교사들의 폭력적인 태도와 또래들의 과격한 집단성에도 염증을 느낀 그는 조용히 홀로 게임에 열중했다. “학교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잤고” 학교가 끝나자마자 게임스쿨을 다니며 게임 제작을 배웠다. 자연스럽게 게임 개발자가 되겠지 생각했던 그의 미래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점수에 맞춰 간 대학에서 그는 예상하지 못했던 공부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신문방송학과로 갔는데 사회학을 복수전공 했어요. 생각보다 사회학이 적성에 맞더라고요.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까지 좀 열심히 다녔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걸 열심히 배웠냐, 그건 아니고 혼자서 돌아다니면서 책 읽고, 사람 만나면서 놀았어요. 주로 소속된 곳보다 소속 바깥으로 나도는 어떤 이상한 기질이 저한테 있나 봐요.”

최태섭 작가가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 맞은편 건물 벤치에 앉아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최태섭 작가가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 맞은편 건물 벤치에 앉아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저도 남자로서 태생적 한계 있지만
남자란 무엇인가 스스로 고민
남성 현실 부정하려 쓴 책 아니라
남자가 억압해온 존재들 말하고자”

“남자들도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진정한 남자가 무엇인지보다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는지를”

‘소속 밖’에서 해온 공부

최태섭은 1984년생이다. 30대 중반인 그는 벌써 단독 저서 4권과 공저 5권을 냈다.

―나이에 비해 책을 정말 많이 쓰셨어요.

“어느 날 친구가 한 청년단체 면접을 보러 가는데 같이 가지 않겠냐고 하더라고요.”

―이거 연예인들 고정 레퍼토리 같은데요. 친구 따라 오디션 갔다가 친구는 떨어지고 자기는 붙고.

“(웃음) 단체에 계신 분이 제가 예전에 쓴 칼럼을 보셨다는 거예요. 그 단체에 출판팀이 있어서 출간을 추진했는데 아쉽게도 책은 나오지 못했지만 계속 글을 쓸 기회를 얻게 됐어요.”

게임을 좋아하던 그가 남성성을 분석하는 연구자가 되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임에 친숙했던 최태섭은 온라인에서 펼쳐지는 청년·인터넷 하위문화에 관심이 쏠렸고 그 공간에서 거리낌 없이 발산하는 남성들의 언어와 논리 체계에 주목하게 됐다. 잉여를 만들어내는 현대 사회의 구조를 잉여 스스로의 눈으로 통찰한 <잉여사회>(2013), 한국 남자의 남성성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분석한 <그런 남자는 없다>(2017), 세월호에서 미투까지 다양한 ‘억울함’을 기록한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2018)로 이어지는 작업들에서 그가 이 사회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이해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이번 책 <한국, 남자>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제가 청년 이슈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열정노동과 잉여사회 문제를 다뤄왔는데요. 그때마다 이 문제들에서 남성이 과잉 대표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터넷에 댓글을 다는 사람들의 성비를 보면 70% 이상이 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어요. 한국에서 주목받는 인터넷 커뮤니티들도 남성 위주 공간이고요. 여성 위주 커뮤니티가 없진 않지만 대체로 회원제에 폐쇄적 방식으로 운영되거든요. 그래서 언론이 인터넷 여론을 수렴한다고 했을 때 남성의 의견이 주로 반영될 가능성이 큰 거죠. 청년들에 대한 담론도 거의 남자 청년들이 불쌍하다,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 이런 식이고요. 그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한국 남자들의 ‘남성성’을 본격적으로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구 곳곳에서 부상하고 있는 ‘남자 문제’를 조망하며 여정을 시작하는 <한국, 남자>는 ‘보편자로서의 남자’가 아니라 ‘개별자로서의 남자’에 대한 이론적·학문적 검토들을 살핀다.

―보편자로서가 아니라 개별자로서의 남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요? 두 개념 사이에서 페미니즘의 구실이 있었다고요?

“성별로만 국한해 봤을 때 대체로 남자가 인간을 대표해왔어요. 말하자면 남자의 덕목이 곧 인간의 덕목이었던 거죠. 물론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 같은 것은 여성의 몫으로 한정해왔고요. 그러다 페미니즘 이후 남자를 하나의 성별로 상대화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보편자의 위상을 누리던 남자를 개별자의 위치에서 볼 수 있게 된 거죠. 페미니즘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남자도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개별자로서 남성에 대한 검토를 거치고 나면 한국 남성의 억울한 연대기가 펼쳐진다. 그 시작을 위해 책은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별히 조선 후기부터 서술을 시작한 이유가 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남자 덕목들’의 역사가 길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어요. 성리학을 신봉하는 선비들이 그 시대 헤게모니를 쥔 남성이었는데요. 이들은 관직에 나가는 것만을 중시했고 가정사를 돌보지 않는 것을 양반 사대부의 미덕으로 여겼어요.”

당연하게도 살림은 부인들 몫이었다. 가사 노동뿐만 아니라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수많은 노동을 해야 했다. 결국 이 시대의 생산과 재생산은 사대부가 아닌 남성 대부분과 여성, 그리고 하층민의 몫이었다.

이런 ‘억울함’의 구조는 근현대 사회로 들어서면서 좀 더 본격화된다. 한국 남성 대부분은 언제나 권력을 쥔 일부 다른 남성에게 휘둘리며 군대와 ‘국가를 위해’ 희생되거나 동원되었다. 식민통치, 한국전쟁, 산업화, 민주화, 신자유주의 시대를 건너며 한국 남성성을 대표해온 가부장성이 흔들리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한국 남성들이 가슴에 새겨온 말을 최태섭은 ‘남자가 피해자다’라고 요약한다.

―그 박탈감의 공격 대상이 억울함을 강요해온 구조가 아니라 여성을 향하는 이유는 뭘까요?

“지금은 ‘대의’가 없는 시대예요. 산업화든 민주화든 (남자의 위상이 흔들려서는 안 되는) 시대적 대의를 앞세울 수 없을 때, 그 박탈감을 해소하기 위한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 생각이 현실과 다를 때, 사회 변화에 맞춰 내 인식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식에 맞게 사회를 조작하는 방식이죠. 가짜뉴스가 사실은 그런 거겠고요. 효능감의 문제도 작용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성 등 상대적 약자를 자꾸 괴롭히게 되는 거예요. 약자를 괴롭히는 게 강자를 괴롭히는 것보다 효능감이 좋으니까. 한국의 경우 젠더 이슈 등에서 분출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인종 문제, 이민자 문제 등에서 터지고 있고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저도 아직은 뚜렷한 답이 떠오르지 않아요.”

최태섭 작가가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 맞은편 건물 앞에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최태섭 작가가 지난 14일 한겨레신문사 맞은편 건물 앞에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한국 남자는 왜 억울한가

―책을 내면서 어느 정도 ‘각오’는 하셨을 텐데, 남성뿐 아니라 페미니스트 진영의 비판도 있다고요?

“뭐 꼭 집어서 비판하시는 분은 아직 안 계셨고요. 에스엔에스에서 ‘한남이 페미니즘 훔쳐서 책 팔아먹지 말라’고 하시는 정도예요. ‘남자가 썼다’는 이유만으로 매도를 당하진 않았으면 좋겠지만, 기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책 자체가 페미니즘을 연구하신 분들이나 페미니스트들한테는 새로운 내용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부터도 그분들 연구 결과를 많이 참고했으니까요.”

―스스로 소위 ‘한남’에 속한다고 보시나요?

“태생적 한계가 있지요. 남성 집단 내부에서 문제가 있었을 때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넘어간 적도 많았고요. 우선은 말 그대로 남자란 뭔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책에도 썼지만, 특히 요즘에는 제가 남자라는 사실이 부적절하게 느껴질 때가 굉장히 많습니다. 제 존재 자체가 예상치 못한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있었고요. 저는 남성을 욕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에요. 한국 남성들의 현실을 부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단순히 자기연민에 빠지기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이들을 억압해온 역사가 길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그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남성 위주 사회에서 자신도 수혜자라고 생각해보신 적은요?

“당연히 있죠.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이런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비교적 쉽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제가 남성이기 때문일 거예요. 제 주위에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데도 발표하기 부담스러워하시는 여성분들이 많아요. 제게는 악플이지만 그분들한테는 신변의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나 혼자 착한 남자가 되는 것으로 끝내면 안 된다고 결론에서 말씀하셨어요.

“남자들이 변해서 좀 더 조심하고 주의하고 현실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남자들도 구조적 현실에 계속 문제제기해야 합니다. 정치적인 관점으로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어요.”

―남성들의 ‘행동’이 적극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세요?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죠. 세계적 추세잖아요. 남성들의 반페미니즘적 행동이 극우정치와 결합해 정권 차원으로 승인되기도 하고요. 하지만 모르겠어요. 협력하도록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들이든, 정책 담당자든, 변화에 동의하는 남성들이든, 서로 힘을 모으도록 만들고 그럴 수밖에 없게 해야죠. 지금은 그 방법을 모색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이 책을 쓴 것이고요.”

―책의 한계도 스스로 밝혀주셨는데요.

“이 책은 분명 반쪽짜리죠. 남성을 똑바로 보려면 여성도 제대로 봐야 하는데, 여성의 이야기가 없다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왜곡된 남성성과 계속 싸워온 남자들도 있잖아요.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저항을 실천했던 남성들이 있었고, 그들이 변화의 흐름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사실을 부각하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어요. 가족 문제, 가족 안에서 아들의 문제, 섹슈얼리티 문제 등도 현실에 접근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하는데 거의 못 다뤘어요. 여건이 된다면 후속 연구를 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이렇게 여쭤볼게요. 남성성을 분석한 기준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때, 한국 남자 최태섭은 어떤 남자인가요? 어떤 남자가 되고 싶으세요?

“한국에 잘 안 맞는 남자죠.(웃음) 안 맞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진퇴양난의 남자. 20대 때는 남성성 자체를 거부했어요. 옷도 가능하면 ‘젠더리스적’으로 입으려고 노력할 만큼요. 그래도 책임감이나 의리는 나쁜 게 아니잖아요. 남성의 덕목만은 아닌데도 남성의 덕목들로 강조되어왔지만 그 자체로는 좋은 거잖아요. 이런 것들은 남성성이 아니라 인간의 덕목으로서 말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남자들도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남성성이란 것이 과연 무엇인지, 누가 강요하는 것인지를요. 진정한 남자, 진정한 여자, 이런 것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타인을 대해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굳이 남자라는 타이틀을 지키려 여자와 싸우지 말고요.”

조금의 과장도 보태지 않고 크고 작은 젠더 이슈가 매일매일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11월20일)도 어떤 래퍼의 노래가 성차별 논란에 올라 있다.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항소심이 시작된다는 기사도 있었다. 지난 9월 ‘에이핑크’ 윤보미와 국외 촬영 중 숙소에서 몰래카메라가 발견되는 끔찍한 사건을 겪은 배우 신세경이 제작발표회에서 ‘절대 선처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는 기사도 읽었다. 아마도 나는 이런 기사들을 내일도 모레도 읽게 될 텐데, 그때마다 <한국, 남자>의 한 부분을 떠올릴 것 같다.

“이런 작업들이 필요한 이유는 먼저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는 타협을 위해서도 싸움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선행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대상을 구성하는 핵심과 취약점들에 대한 인식이 얻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화목해야 하며, 동시에 다투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태섭을 만든 시간들

1986년 2살. 서울 금천구 독산동 단칸방에서 살 때. 장난감 기타를 치며 놀았다.
1986년 2살. 서울 금천구 독산동 단칸방에서 살 때. 장난감 기타를 치며 놀았다.

2011년 27살. 첫 책&nbsp;(공저)를 낸 뒤 인하대학교에서 처음으로 혼자 강연을 했다.
2011년 27살. 첫 책 (공저)를 낸 뒤 인하대학교에서 처음으로 혼자 강연을 했다.

2013년 29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사무 공간에서 칸막이로 구분된 책상 하나를 빌려 를 썼다.
2013년 29살.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사무 공간에서 칸막이로 구분된 책상 하나를 빌려 를 썼다.

2015년 31살. 병장 시절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날. 서른 무렵이던 2013년 11월 입대했다.
2015년 31살. 병장 시절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날. 서른 무렵이던 2013년 11월 입대했다.

2016년 32살. 서울 광화문에서 참여한 인생 네번째 촛불집회. 그리고 첫 승리. 2002년 효순·미선 추모,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때도 촛불을 들었다.
2016년 32살. 서울 광화문에서 참여한 인생 네번째 촛불집회. 그리고 첫 승리. 2002년 효순·미선 추모,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때도 촛불을 들었다.

34살.  출간 직후 서울 마포구의 출판사에서 증정본에 사인을 했다.
34살. 출간 직후 서울 마포구의 출판사에서 증정본에 사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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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느슨해지고 싶어? 벙벙한 슈트를 골라봐 : ESC : 특화섹션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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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느슨해지고 싶어? 벙벙한 슈트를 골라봐

등록 :2019-10-02 20:52수정 :2019-10-02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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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여성 슈트 역사 출발은 대략 1960년대
올가을 트렌드는 과장된 실루엣 슈트
당당한 여성성 강조한 디자인
밝은 컬러나 회색 등이 우아해
넓은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실루엣으로 트렌디한 슈트 스타일을 완성한 아크네. 사진 아크네 제공
넓은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실루엣으로 트렌디한 슈트 스타일을 완성한 아크네. 사진 아크네 제공

2019 가을·겨울 패션 트렌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스타일을 고르라면? 고민할 필요 없이 ‘슈트 룩’이다. 지난 몇 년간 런웨이에서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내던 팬츠 슈트가 이번 시즌 트렌드의 정점에 오를 것이다.

여성 해방의 역사와 슈트

여성 복식의 역사에서 슈트가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때는 1960년대다. 1966년 프랑스의 디자이너 이브 생로랑은 당시 남자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턱시도를 변형시킨 ‘르 스모킹’(Le Smoking)을 선보였다. 르 스모킹은 프랑스어로 턱시도란 뜻이다. 당시 여성들은 바지를 입고 공공장소에 나타나는 게 금기시 됐었다. 한편 여성의 인권 신장을 주장하는 여성해방운동이 한참인 시기이기도 했다.

1966년께 발표한 이브 생로랑의 르 스모킹은 당시 파격을 뛰어넘어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다음 해인 1967년, 이브 생로랑은 여성의 몸에 맞게 재단된 ‘핀 스트라이프’(점선무늬) 패턴의 재킷과 바지로 구성된 본격적인 팬츠 슈트를 선보였다. 그 후 여성 슈트는 1980년대 다시 한 번 유행한다. 당시 유행한 여성 슈트는 사회적 흐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본격화된 시기가 1980년대이기 때문이다. 어깨가 강조된 디자인의 오버 사이즈 슈트가 유행했는데, 이런 디자인 역시 여성의 인권과 관련한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1990년대의 슈트는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이라는 패션 트렌드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질 샌더와 조르지오 아르마니, 헬무트 랭, 살바토레 페라가모 등은 매 시즌 절제된 디자인의 심플하고 모던한 슈트를 선보이며 더는 슈트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님을 전 세계에 알렸다.

여성 슈트 스타일이 대중화하기 전, 슈트를 즐겨 입었던 배우도 있다. 1966년의 이브 생로랑에게 영감을 준 독일 출신 할리우드 배우 겸 가수 마를렌 디트리히가 그 대표적 예다. 그는 1930년대 이미 슈트를 즐겨 입었다. 디트리히가 즐겨 입었던 스타일은 ‘디트리히 슈트’라고 불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의 스타일은 지나치게 파격적이어서 파리경찰서장이 파리를 떠날 것을 권유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도 미국의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에서 여우주연상 등을 수차례 타 ‘오스카의 여왕’이라 불리던 할리우드의 연기파 배우 캐서린 헵번 역시 남성적인 디자인의 팬츠 슈트를 즐겨 입었다. 지적이면서도 강인한 이미지의 그는 “미국 여성에게 처음으로 바지를 입힌 배우”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이렇듯 팬츠와 슈트가 여성 복식에 등장하고 안착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존재감만은 패션계의 어떤 아이템보다 강력하다. 특히 이번 시즌에는 더더욱 말이다.

부드러운 크림색 슈트에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발렌티노. 사진 발렌티노 제공
부드러운 크림색 슈트에 리본으로 포인트를 준 발렌티노. 사진 발렌티노 제공

과장된 실루엣···여성 슈트의 자신감

이번 시즌 여성 슈트의 핵심은 ‘여성적 표현’이다. 남성복에서 시작된 슈트를 여성의 몸에 맞게 변화시켜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표현한 것이다. 남성 슈트는 대개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어깨와 소매, 옷깃의 끝은 날카롭게 재단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슈트를 입으면 체형의 단점을 어렵지 않게 숨길 수 있다.

이번 시즌 여성용 슈트는 남성 슈트의 이미지는 차용했지만, 유려한 여성의 보디라인을 강조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가슴과 허리, 엉덩이의 에스(S) 라인 등 여성의 몸에서 볼 수 있는 곡선의 미를 살린 것이다. 여성의 몸을 대상화한 것이 아니라 독립적인 주체로서 자신감을 당당하게 표현했다. 동시에 여유롭고 느슨한 실루엣을 유지했다.

런웨이에 오르는 슈트 룩의 대부분은 공통점이 있다. 재킷의 경우 벨트 장식을 이용하거나 단추 위치를 옮겨 허리 라인을 강조했다. 엉덩이를 덮는 넉넉한 길이와 어깨 길이 역시 실제보다 다소 과장된 크기로 재단했다. 슈트의 전체 이미지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어깨다. 타이트하고 날카로운 어깨선은 지적이고 세련된 분위기를, 부드럽고 과장된 실루엣의 어깨선은 온화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번 시즌은 단연 후자가 강세다.

재킷과 마찬가지로 바지 역시 다소 헐렁한 핏의 디자인을 고르는 것이 트렌디한 선택이다. 1980년대를 휩쓸던 ‘슬라우치 룩’(헐렁하고 축 늘어진 듯 편안한 옷차림)처럼 느슨하고 편안해 보이는 핏이 강세다. 좀 더 격식을 차리고 싶다면 ‘와이드 팬츠’(밑으로 갈수록 폭이 넓은 바지)를 매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넓은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실루엣으로 트렌디한 슈트 스타일을 완성한 아크네. 사진 아크네 제공
넓은 어깨와 허리를 강조한 실루엣으로 트렌디한 슈트 스타일을 완성한 아크네. 사진 아크네 제공
이번 시즌 슈트를 선택할 때 마지막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바로 컬러다. 네이비블루, 블랙 등의 색을 선호했다면 이번에는 좀 더 밝은 컬러로 눈을 돌려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상·하의를 같은 컬러로 통일해야 한다. 올가을, 가장 바람직한 색을 하나만 고르라면 바로 회색이다. 이 계절에 그레이 컬러 슈트보다 모던하고 우아함을 잘 어필할 패션 아이템은 없다. 노란색이 한 방울 섞인 듯한 멜란지 그레이부터 블랙에 가까운 차콜 그레이까지 선택지는 꽤 다양하다. 그레이 컬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차선은 톤 다운된 그린, 바이올렛, 핑크 등의 색과 뉴트럴한 컬러다.

마음에 드는 슈트를 선택했다면, 스타일링에 신경을 써야 한다. 올가을 슈트를 누구보다 멋지게 소화하고 싶다면 대담함을 겸비해야 한다. 이번 시즌 디자이너들은 깊게 파인 네크라인으로 여성성을 또 한 번 강조했다. 블라우스나 셔츠를 입는다면 단추를 풀어 섹슈얼한 분위기를 더해도 좋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킷을 마치 상의처럼 연출했다. 칼라 사이로 훤히 드러나는 가슴 라인과 강조된 허리 라인은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를 선사한다. 목이 허전하면 남성용 타이 두께 정도의 가느다란 스카프를 목에 꼭 끼게 감거나, 초크 형태의 목걸이를 매치하는 것이 좋다.

슈트는 더이상 남성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 벌로 멋지게 빼입은 슈트는 올가을 누구보다 당신을 트렌디하고 자신감 넘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신경미(패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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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문화일반

[주말 본방사수] ‘같이 펀딩’ 유준상과 같이 디자인하는 국기함

등록 :2019-08-23 14:24수정 :2019-08-2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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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펀딩(문화방송 일 오후 6시30분) 다양한 분야의 ‘가치’ 있는 아이디어를 크라우드펀딩으로 실현해보는 예능프로그램으로, ‘유준상의 국기함 2차 펀딩’을 시작한다. 지난주 방송에서 배우 유준상은 “태극기가 모두의 마음에 펄럭이길 바라며” 아주 특별한 국기함을 제작하기로 했다. 그에 앞서 역사 강사 설민석과 함께 진관사를 찾아 눈시울을 붉히며 태극기의 의미를 되새겼다. 2회에서는 유준상이 국기함을 만들려고 다양한 장소를 오가며 아이디어를 모으고 세부적으로 디자인하는 과정이 공개된다. ‘같이’의 가치를 높이려고 국기함과 태극기 제조 업체는 중소제조기업 및 소상공인들로 선정했다고 한다. 방송과 함께 2차 펀딩도 진행한다. 수익금 전액은 독립유공자를 위해 기부한다.

녹차밭에서 일손 돕는 효리네

일로 만난 사이(티브이엔 토 밤 10시40분) 첫 방송. 유재석이 매회 초대 손님과 일손이 부족한 곳을 찾아가 땀 흘려 일하는 프로그램이다. <제이티비시>(JTBC)에서 화제를 모은 <효리네 민박>을 연출한 정효민 피디가 <티브이엔>에서 첫선을 보인다. 그 인연으로 첫 회 손님은 이효리와 이상순 부부다. 이들은 지난 7월 제주의 한 녹차밭에서 일했다. 키보다 높게 자란 녹차나무 숲을 정리하는 바쁜 와중에도 걸핏하면 투닥투닥하는 이효리와 유재석의 호흡이 재미를 준다.

대전 철도관사촌에서의 72시간

다큐멘터리 3일(한국방송2 일 밤 10시35분) 100년 가까이 이어온 대전시 소제동 철도관사촌 골목과 대전역 및 대전역전 새벽시장 등 다양한 풍경과 삶의 모습을 72시간 밀착 취재했다. 대전 소제동은 일제강점기 일본인 철도관계자들이 많이 거주해 일명 ‘철도관사촌’으로도 불린다. 최근 재개발 사업이 가시화되면서 철도관사촌은 사라질 상황에 처했다. 상당수 주민은 떠났고, 몇몇 가게는 남아 골목을 지킨다. 오늘의 소제동 일상을 통해 과거를 되짚는다.

오바마가 ‘픽’한 성장 다큐, 마인딩 더 갭

이비에스(EBS) 국제다큐페스티벌―마인딩 더 갭(교육방송 일 저녁 8시20분) 전세계 좋은 다큐를 소개하는 ‘국제다큐페스티벌’에서 선보이는 작품이다. 미국 일리노이주의 작은 도시에서 성장한 20대 감독 류빙이 만든 자전적 영화다. 불안정한 가정환경과 복잡한 현대 남성성의 연관 관계를 풀어낸다. 올해 아카데미상과 에미상 후보에 올랐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올해의 영화’ 중 한편으로 꼽아 화제를 모았다.

분쟁의 총구 앞에서도 꽃피는 아이들의 우정

이비에스(EBS) 국제다큐페스티벌―몰렌베크의 아이들(교육방송 토 오후 3시10분) 지하디즘의 본거지가 되어버린 브뤼셀 몰렌베크에 6살 소년 아토스와 아민이 산다. 핀란드에서 온 소년과 이슬람계 소년은 둘도 없는 친구다. 테러가 격화되면서 무슬림계와 그에 맞서는 시민들의 시위가 벌어진다. 분쟁이 끝나지 않는 곳에서도 우정을 나누는 아이들을 통해 분노와 적개심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질문한다.

‘주전자 로봇’이 아빠 대신 일하면 좋겠다…

동행(한국방송1 토 오후 6시) ‘아빠와 고물 로봇’ 편. 아빠는 낡은 트럭을 타고 경북 상주 도로를 달린다. 재활용품이 보이면 차를 멈춘다. 아빠는 폐지, 고물을 수집해 되파는 일을 한다. 아빠는 8년 전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운다. 열한살 아이는 아빠가 일을 하러 나가면 집에 가득한 고물을 활용해 로봇을 만든다. 로봇이 아빠 일을 대신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일개미 아빠와 사랑이 필요한 아들의 여름을 들여다본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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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드랙, 나다울 자유 : ESC : 특화섹션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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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드랙, 나다울 자유

등록 :2019-07-17 20:32수정 :2019-07-1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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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드랙

2002년 <헤드윅> 개봉
한국 사회에 스며드는 드랙 문화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들의 얘기
드랙 아티스트는 자유 표방
최근에 각종 드랙 축제도 열려
드랙 문화를 공유하고 고민하는 공동체 ‘드랙갱즈’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드랙 킹 또는 드랙 퀸으로 꾸미고 모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드랙 아티스트 리들, 시몬, 아장맨, 소다 캔디팝, 아키라, 포샤, 뽀뽀. 사진 김지영 제공
드랙 문화를 공유하고 고민하는 공동체 ‘드랙갱즈’의 구성원들이 저마다 드랙 킹 또는 드랙 퀸으로 꾸미고 모여 사진을 찍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드랙 아티스트 리들, 시몬, 아장맨, 소다 캔디팝, 아키라, 포샤, 뽀뽀. 사진 김지영 제공
2002년 영화 <헤드윅>이 한국에서 개봉했다. 국내 대중문화 영역에 ‘드랙’(드래그)의 존재가 발을 디딘 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뒤 2005년 뮤지컬 <헤드윅>이 무대에 올랐고, 초연 뒤 그 인기는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국내 초연 14년을 맞는 뮤지컬 <헤드윅>은 오는 8월16일, 지난 마지막 공연이 있은 지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그러나 ‘드랙 퀸’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헤드윅> 속 드랙 문화는 드랙 문화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 ‘드랙’은 사회에서 정하고 요구하는 여성성, 남성성을 허무는 싸움이다.” 지난 6월29일 250여명이 넘는 관객이 모인 가운데 열린 ‘부산 드랙 프롬’에서 만난 드랙 아티스트 ‘왕자’의 설명이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그는 그 안에 갇혀있을 뿐이었다. 20대인 왕자, 그는 스스로를 ‘넌바이너리’(non-binary)라 여긴다. 여성도 남성도 아닌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다. 왕자는 “드랙 킹 아장맨의 무대를 영상으로 2017년 처음 접했는데, 그게 뇌리에 떠나지 않았다. 동시에 그 당시 ‘넌바이너리‘인 나를 표현하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었는데, 드랙을 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드랙 메이크업을 하는 그에게 어머니는 “무슨 괴물 같은 화장을 하고 그러니!”라고 타박한다. 왕자는 어머니의 타박이 칭찬으로 들린다. “기괴한 화장을 좋아한다. 한눈에 보고 여자일까, 남자일까 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게 하는 그런 화장 말이다.”

부산 드랙 프롬의 무대에 오른 드랙 아티스트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자유’ 그 자체다. 표현하고 싶은 자신을 가두지 않고, 무대 위에 팔딱팔딱 뛰게 풀어 놓는다. 각자의 몸은 백색 도화지일 뿐이다. 도화지 위에 형형한 색감을 발하는 드랙 아티스트들의 몸짓에 자유의 에너지가 넘친다. 관객들도 그 힘에 이끌린다. 관객으로 참석한 제이(가명)는 “드랙 아티스트의 공연을 보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되고, 나 역시 거기에서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영화나 유튜브 등 영상으로 보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개성이 뚜렷한 드랙 아티스트들이 모여 대안 가족, 대안 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른바 ‘하우스’의 탄생이다. ‘하우스’는 드랙 아티스트를 비롯한 성 소수자 등이 모여 이룬 가족이다.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스스로 선택한 ‘가족’이다. 보다 다양하고 안전하고 건강한 드랙 문화를 소개하고자 하는 드랙 아티스트들이 모여 ‘하우스 오브 허벌’이라는 대안 가족 공동체를 만들기도 했다.

드랙 문화는 여전히 국내에서 낯설다. 그들이 무대에 풀어놓는 이미지들은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동떨어진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제 국내에서도 드랙 문화 또는 그 요소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늘고 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와 별도로 서울드랙퍼레이드가 올해로 2회째를 맞았고, 드랙 킹들이 퍼포먼스를 뽐내는 드랙킹 콘테스트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열렸다. 드랙 공동체 ‘드랙 갱즈’는 드랙 문화를 경험해 볼 수 있는 워크숍도 7월부터 8월까지 진행한다. 당장 동영상 콘텐츠로 드랙 메이크업을 배워볼 수도 있다. ESC가 낯선 아름다움을 좇는 사람들을 위해 ‘드랙 문화’를 소개한다.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드랙(Drag) 드래그. 성별이나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의상과 화장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을 일컫는다. 드랙 문화는 공연 문화, 성 소수자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남성 또는 여성이 의상과 화장을 통해 표현한 여성을 ‘드랙 퀸’이라 한다. ‘드랙 퀸’이 등장하는 영화와 뮤지컬이 인기를 얻으며 ‘드랙 문화 = 드랙 퀸 문화’로 여겨지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이해다. 드랙 킹, 성별 또는 성별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 드랙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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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젠더 갈등, 비겁한 변명 / 박다해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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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한겨레 프리즘] 젠더 갈등, 비겁한 변명 / 박다해

등록 :2019-09-24 17:33수정 :2019-09-2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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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셈의 계절이 다가온다. 나라 살림 얘기다. 이달 초 정부는 내년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예정대로라면 국회 심의를 거쳐 12월 초에 확정될 터다. 눈여겨본 건 성인지 예산이다. 이는 국가 재원이 성차별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사용되는지 평가하는 제도로 각 부처는 성평등 목표, 성별에 따른 효과를 분석해 일부 사업을 성인지 예산에 포함한다.

내년에 편성된 성인지 예산은 총 31조7963억원이다. 올해보다 무려 25.1% 늘었다. 그런데 속살을 들여다보면 어째 뒷맛이 씁쓸하다. 교육부가 109억원을 편성한 ‘장애학생 교육지원사업’은 “성인지적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여성 장애인의 역량 강화 및 사회 참여를 위한 기반 제공”을 목표로 하는데, 최근 3년간 사업 수혜 대상자의 여성·남성 비율은 3 대 7로 남성에 치우쳤다. 행정안전부는 ‘민방위 교육 훈련 및 시설장비 확충’ 사업예산 87억원을 성인지 예산에 포함했는데, 전체 민방위 대원 약 359만명 가운데 여성 지원자는 4만여명으로 1.2%에 그친다. 시행 대상도, 수혜 비율도 기존의 불균형을 그대로 반영하는데 과연 어떤 차별을 개선할 수 있을까? 난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성인지 예산의 실효성 논란은 반복돼왔다. 성과목표 달성률은 60∼70%대로 매년 실적이 저조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무관심의 합작품이다. 미흡함의 책임을 국회와 정부는 서로한테 떠넘긴다. 국회에선 “각 부처에 예산 편성 지침을 내리는 기획재정부가 꿈쩍 않는다”는 말이, 정부 쪽에선 “의원들이 관심이 없어 심사가 제대로 안 된다”는 말이 나온다. 의무 편성 비율도, 촉진 동력도 없다 보니 상징적 지표에만 그친다. 성인지 예산은 ‘성평등’이란 의제가 정치권에서 어떤 위치인지 보여주는 바로미터인지도 모른다.

이런 무관심이 180도 뒤집힐 때가 있다. ‘젠더 갈등’이 등장할 때다. 20대 남성의 지지율이 떨어진다는 데 화들짝 놀라서다. 한쪽은 떨어진 지지율 회복을 위해, 다른 한쪽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기 위해 시시때때로 젠더 갈등 프레임을 정치적 셈법에 동원한다. 표심이 흔들리니 ‘성평등’을 찾는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화살은 오로지 여성가족부로만 향한다는 것이다. 지난달 30일 열린 이정옥 여가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 한 여당 의원은 “지금 젠더 갈등이, 20대 남성들에게 여가부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되고 있다”며 갈등의 원인과 해법을 모두 여가부의 몫으로 돌렸다. 온라인 커뮤니티의 왜곡된 정보와 의견을 답습해가며 여가부를 공격하는 데만 혈안이 된 야당 의원도 있다.

성평등에 대한 성별 간 인식 차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갈등의 원인을 근본부터 다시 짚자는 거다. 이는 20대 남성이 왜 스스로를 약자로 인식하는지에 대한 분석부터 시작돼야 한다. 이들은 “강하고, 성공해야만 하고,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전통적인 남성성’에 동의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는 집단”(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다. 이들의 ‘역차별’ 주장 뒤엔 “공정함을 ‘노력에 대한 차등적 보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재분배 이슈는 결과를 조정하려는 정부의 부당한 개입으로 취급하는”(전효관·김수아·김선기, 정책기획위 ‘젠더 갈등을 넘어 공존의 모색’ 토론회) 인식도 깔려 있다.

이들의 목소리에 누가 제대로 귀를 기울여봤나. 지난해 연내 통과를 전망했던 청년기본법은 또 감감무소식이다. 성차별 개선을 위해 쓰라는 예산은 10년 넘게 헛바퀴만 돌고 있다. 젠더 갈등에 호들갑을 떨며 여가부를 비난하는 이들의 발언이 ‘비겁한 변명’으로만 들리는 이유다. 노르웨이는 성평등을 위한 남성의 책임 강화를 추구하는 ‘리폼’센터를 국가가 운영한다. 차라리 여가부를 ‘성평등부’로 확대 개편하고 예산을 여기에 대폭 투입하는 건 어떤가. 젠더 갈등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상상력의 셈이라도 굴려보자는 얘기다.

박다해
사회정책팀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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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이 될 수 없는 형제여,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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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책&생각

가부장이 될 수 없는 형제여,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등록 :2018-11-01 19:37수정 :2018-11-02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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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가 최태섭의 ‘한국 남성’ 분석
식민지배부터 전쟁, 압축적 근대화까지
결코 실현되어본 적 없는 ‘남성성’ 지적
‘억울하다’ 환상 넘어 새 주체성 찾아야
한국, 남자-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
최태섭 지음/은행나무·1만5000원

한때 일부 한국 남자들은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한다”며 ‘된장녀’에게 돌을 던졌다. 그런데 이제는 “여자는 왕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는 문구가 새겨진 옷을 입었다며 ‘메갈년’이라고 분노한다. 도대체 뭘 어쩌자는 걸까? 이런 장면도 있다. 이른바 ‘미러링’을 통해 한국 남성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어떤 남성들은 호기롭게도 “한국 여자와 섹스하지 말자”는 주장을 내놨다. 그런데 “한국 남자들의 그 모든 주장 가운데 이렇게 여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은 것은 없었다.” 이런 현상들은 ‘한국 남성’이란 존재 자체가 헤어나오기 힘든 어떤 ‘곤란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년, 노동, 잉여와 같은 테마들로 우리 사회의 변화하는 지형을 관찰해온 문화비평가 최태섭(34)은 최근 펴낸 책 <한국, 남자>를 통해 이 한국 남성의 ‘곤란함’을 깊숙하게 들여다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곤란함’의 정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한국 남자는 그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도 이상적인 상(남성성)을 현실로 구현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실패를 언제나 다른 사회적 약자들 특히나 여성의 탓으로 돌려왔다.” 스스로 30대 중반에 접어든 한 명의 한국 남자로서, “누군가를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한 사람의 주체로, 또 타인과 연대하고 돌보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지은이의 고민이 책 전체에 서려 있다.

‘남성성’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두루 살펴본 지은이는, 남성성이란 것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어떤 지배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지적한다. “남성성은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투쟁과 동의, 전략의 산물”이다. 이 ‘헤게모니적 남성성’은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와 남성 우위의 사회 체계를 지키기 위해 작동하고, 남성들은 이 체계에 복무하는 대가로 ‘배당금’을 챙긴다. 문제는 이 ‘배당금’이 여성 등 남성성에 해당하지 않는 것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데서 만들어지며, 남성 내부에서마저 불공정하게 배분된다는 것이다. “남성 지배란 소수의 권력을 가진 남성들을 위해 다수의 별 볼 일 없는 남성들이 열과 성을 다해 복무하는 불공정한 게임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는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성 모델에 주로 기대왔다. 그러나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한국 남성은 단 한 번도 온전한 가부장이었던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가부장제는 ‘생계 부양자’로서 남성성 모델에 주로 기대왔다. 그러나 문화평론가 최태섭은 “한국 남성은 단 한 번도 온전한 가부장이었던 적이 없다”고 지적한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의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강력한 가부장제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결합”으로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구축했으나, 식민 지배와 전쟁, 빈곤과 압축적 근대화 속에서 남성들이 끊임없이 국가 폭력, 전쟁, 빈곤에 희생당하는 등 한국 사회가 내세웠던 남성성은 결코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보편적인 근대화란 정상 가족을 이루고 중산층이 되어, 가장 곧 ‘생계 부양자’의 지위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가족을 온전히 먹여살리지 못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산업화 시대 기혼 남성들이 실제로 가족을 온전히 부양할 수 있었는지 살펴본 연구 결과를 보면,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남성들의 고용 상태는 하향 이동했다. 이와 맞물려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증가했다. “대다수의 한국 남자들의 경제적 삶이란 좌절의 연속이고, 결국 여성들은 어떤 형태로든 경제활동에 종사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가부장제가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피지배 남성들의 불안과 고통이 그것을 가져다준 지배 체제로 향하지 않고 그들보다 더 아래에 있던 여성에게 향했기 때문이라 한다. 남성성을 추구하며 생긴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과 여성 혐오는 지배 남성들이 피지배 남성들에게 던져 준 ‘먹잇감’이었다. 1950년대에 이미 양공주, 자유부인, 유엔 마담 등 ‘부도덕한 여성’을 제물로 삼는 여성 혐오가 있었다.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나마 가족을 중심으로 모여서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는 생각도 가부장제 유지에 영향을 끼쳤다.

한국 사회에선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했음에도 가부장제가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최태섭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만연한 가운데, 사실 별로 미덥지 못한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을 중심으로 뭉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영화 <국제시장> 가운데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 사회에선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이 안정적으로 정착하지 못했음에도 가부장제가 존속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최태섭은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이 만연한 가운데, 사실 별로 미덥지 못한 국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가족을 중심으로 뭉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짚는다. 영화 <국제시장> 가운데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변화는 90년대에 찾아왔다. 외환위기는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한마디로 “돈을 벌어오지 못한다면 아버지란 대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한국 사회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적 재편이 기존 남성성의 변화를 촉구한 셈이다. 그러나 남성들은 여전히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남성성 헤게모니 자체는 와해되지 않았다. 정작 구조조정의 칼바람 속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여성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억울한 남자들”, 여성에게 목을 매면서도 여성을 혐오하는 ‘곤란함’에 빠진 남자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났다고 지은이는 진단한다. 청년 세대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전반적으로 악화하면서, “2000년대 새로운 남성 청년들은 남성성에 대한 신파적 향수와 페미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무장하게 됐다.” 곧 결코 실현된 적 없는 과거의 남성성을 조작해 만들어내고 그것을 그리워하며, ‘이젠 남성이 여성에 견줘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식의 ‘자기 피해’ 서사를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90년대 말 ‘군 가산점 논란’은 이런 흐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고, 그것은 이제 온라인 놀이 문화 등을 타고 “출구 없는 순환”을 하며 광범위한 여성 혐오로 확산되고 있는 중이라 한다.

“물론 2000년대 중반 이후 청년 세대 남성들이 이전 세대의 남성들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놓여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청년 세대 남성들보다 더 열악한 곳에 청년 세대 여성들이 있다는 것 역시 사회적 사실이다. 수많은 통계와 지표들이 고용, 임금, 노동 과정 전반에 걸쳐 여성들이 차별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한국의 성별 고용률에서 여성이 남성에 앞서는 것은 오직 20대 때뿐이고 30대가 되는 순간 남성의 고용률은 수직 상승하는 반면 여성의 고용률은 급격하게 하락하기 시작한다.”

‘군 가산점’ 폐지에 반대하는 예비역 남성들의 집회 장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격렬하게 일어났던 ‘군 가산점’ 논쟁은 “남성이 ‘오히려’ 사회의 피해자”라는 적반하장식 주장이 나오는 흐름의 첫머리에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군 가산점’ 폐지에 반대하는 예비역 남성들의 집회 장면.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에 격렬하게 일어났던 ‘군 가산점’ 논쟁은 “남성이 ‘오히려’ 사회의 피해자”라는 적반하장식 주장이 나오는 흐름의 첫머리에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여성들이 이런 오랜 차별과 억압을 뚫고 끊임없이 자기 주체화를 시도해 세상을 바꿔나가는 동안 남성들은 과연 무엇을 했는가?

이것이 지은이가 던지는 핵심적인 물음이다. 과거에도 제대로 실현된 바 없는 남성 생계 부양자 모델은, 앞으로 더더욱 급격하게 해체되어갈 것이란 현실이 눈앞에 있다. 이런 판국에 한국 남성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의존해줄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과거의 환상에 매달리고 있다. “스스로 하나의 독립된 주체로 서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이는 여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남자들이다.”

“마스크를 쓰고 여성들의 시위에 나가 분탕질을 치는 것도, 염산을 뿌리겠다고 협박 글을 올리는 것도, 이퀄리즘을 주장하고 총여학생회를 없애자고 선동하는 것도, 남자들을 아무 곳으로도 데려가지 않는다. 그러니 이제 결정해야 한다. 어디로 갈 것인가 형제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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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학교폭력의 악몽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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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학교폭력의 악몽

등록 :2018-12-11 17:55수정 :2018-12-11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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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폭력이든 심적 따돌림이든 그 후유증이 피해자를 보통 평생 따라다니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 학교폭력을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약 9~10%의 취학연령 아동들이 경험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학교폭력은 계급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의 축약판이다. 체벌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가정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도록 사회가 노력한다면 적어도 최근의 북유럽에서처럼 학교에서의 물리적인 폭력은 감소세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11월13일, 인천 중학생 집단폭행과 추락사 사건을 접하고 나서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피해자의 마지막 순간들을 상상하면 이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 자체가 금방 사라질 정도다. 그런데 과연 끔찍했던 것은 마지막 순간들만이었을까? 가난하기에, 다문화 가정 출신이라서 남들과 조금 다르게 생겼기에 학교에서 매일같이 모욕당하고 얻어맞아야 했던 아이의 삶 자체가 고문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물리적 폭력보다 심적 따돌림이 훨씬 더 흔한 노르웨이에서마저도 따돌림 피해자들이 모욕으로 점철되고, 자존감 확립의 기회를 주지 않는 삶을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은 종종 있었다. 물리적 폭력이든 심적 따돌림이든 그 후유증이 피해자를 보통 평생 따라다니며 어른이 되고 나서도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 악덕한 고문과 다를 바 없는 후유증을 남기는 학교폭력을 대한민국에서 적어도 약 9~10%의 취학연령 아동들이 경험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름이 끼칠 따름이다. 아무리 앞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과 같은 4만달러가 되고 미국과 같은 6만달러가 된다 해도, 가난과 ‘남과 다른 외모’ 말고는 지은 죄도 없는 아이가 고문을 당해야 하는 나라는 과연 살기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인천 중학생 추락사 사건을 생각하면서 나는 내 자신의 아동기를 떠올리기도 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처럼 나도 중학교 시절에 줄곧 ‘왕따’로 살았다. 피해자가 ‘다문화’라고 야유를 당했다면 나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따돌림과 폭력을 당했다. 피해자의 ‘다르게 생긴 얼굴’이 가해자들에게 문제(?)가 됐다면 나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모욕과 욕설을 듣곤 했다. 나의 경우나 내가 직접 목격한 다른 학교폭력의 경우에는 대개 피해자들의 내성적 성격과 주먹질 능력의 부족 등이 가해자들에게 폭력의 빌미를 주곤 했다. 물론 이미 혁명정신이 해이해질 대로 해이해진 말기의 소련이라 하더라도 한시간 반이나 진행되는 집단폭행이라든가 추락사 등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과도한 학습노동 스트레스와 과열 경쟁, 각자도생의 병리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아니라면 보통의 10대 중반 아이들이 이런 일을 저지를 만큼 심성이 쉽게 난폭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단폭행도 아닌 모욕적 제스처나 폭언이라 해도, 계속 몇년간 듣다 보면 마음속에 응어리가 생기기에 충분하다. 나로서는 모든 민족들의 친선과 고상한 공산주의적 도덕률을 말로 선포하면서 실생활에서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아이들 사이의 약육강식을 말리지도 못하는 국가와 사회가 괘씸하기만 했다. 어른 사회의 언행불일치가 너무나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한데 나는 아동기에 폭력을 당하면서 계속 그 원인들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기도 했다. 대타적 폭력 충동이 인간성의 내재적인 일부분이라는 생각을 나는 일단 처음부터 일축했다. 나를 포함한 여러 폭력 피해자들도 분명히 같은 인간인데, 왜 타자에게 폭력을 가하고 싶은 충동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가? 폭력이 ‘모든 인간들의 본능’이라기보다는 어떤 특정 상황에서 발현된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예컨대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수는 집에서 엄한 아버지로부터 체벌을 당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실은 나같이 싸움에 약한 급우들에게 스스로 그런 ‘엄한 아버지’가 되어 체벌을 흉내 낸 폭력을 가함으로써 본인들이 집안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절로 들곤 했었다. 가해 학생들이 가끔 보드카를 마신 채 집에 와서 주정을 부리는 아버지들을 언급하기도 했다. 이런 아버지들이야말로 실은 그들의 롤모델이 아닌가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가해자들의 가정 배경과 함께 나는 가해자들이 나를 향해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곤 했다. ‘뚱뚱보’나 ‘유대놈’이 제일 흔했지만, 빈도수로 따지면 그다음으로 많은 것은 ‘계집애 같다’와 ‘걸레’였다. 즉, ‘계집애처럼’ 주먹질이나 발차기를 제대로 못하고, ‘걸레’처럼 우유부단하며 비남성적이라는 뜻이었다. 나뿐만 아니고 유대인이 아니어도 근육질과 공격적인 남성성을 지니지 않은 다른 남자 급우들의 상당수도 피해자가 되곤 했다. 물론 이와 같은 남성관이 가해자들의 집안에서, 체벌을 일삼는 ‘엄한 아버지’로부터 전해진다고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학교나 사회는 이와 같은, 공격성 본위의 남성관을 방치하거나 부추기는 게 아닌가? 아동기의 나는, 그 생각을 할 때마다 어떤 커다란 모순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일면으로는 학교나 사회가 내세우는 이상은 분명히 폭력의 정반대였다. 전쟁은 자본주의 모순의 산물이며, 전세계가 공산주의로 진보하면 전쟁의 원인이 없어져 세계평화가 바로 확립될 거라는 것이 학교 사상교육의 골자였다. 수업에서는 ‘평화를 위한 투쟁’, 그리고 니카라과 같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미 제국주의 대리전이나 한국의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전두환 파쇼도당에 대한 미국의 지원 등에 대한 비판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학교나 사회가 제시하는 궁극적 이상으로 봐서는, 싸움에 무능한 나 같은 인간들도 분명히 머리를 똑바로 치켜들고 자존감을 가지며 살 수 있었다. ‘평화’는 우리의 주된 표어였기 때문이다.

한데 또 일면으로 이와 동시에 학교의 복도에 나갈 때마다 자동총을 들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실린 벽보를 읽을 수 있었다. 아프간에 파견되어 ‘반동세력에 대한 토벌’을 한다는 ‘멋진 군인’들을, 학교는 학생들에게 남성의 롤모델로 열심히 홍보했던 것이다. 벽보뿐인가? 자국, 즉 러시아 역사교과서는 거의 ‘우리나라 명장들’의 전시관이나 다름없었다. 각종 ‘명장’이나 ‘대첩’들의 그림과 함께 아이들의 어린 머리에는 일종의 군사주의적 선악 이분법이 주입되곤 했다. ‘우리나라’가 관련된 전쟁이라면 ‘우리’는 완전무결, 절대선 그 자체여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소련 군인들이 점령지 독일 등지에서 자행한 성범죄 같은 것은,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었기 때문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 군인’은 상남자 그 자체였다. 거기에다가 교련수업이나 저녁마다 티브이가 보여주는 전쟁 관련 영화 등등. 가해 학생들에게 ‘싸움질 잘하는 남자’가 ‘정상’으로 보이고 나처럼 ‘싸움질 못하는 남자’는 모욕해도 되는 ‘비정상’으로 보인다는 것이 어쩌면 이런 자가당착의 사회에서는 필연일 수도 있겠다는 것이 그 당시 나의 결론이었다.

학교폭력은 계급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모순들의 축약판이다. 북유럽처럼 가정에서의 체벌까지 엄금하고 학교마다 주기적으로 폭력방지 역할극을 조직하여 모든 학생들에게 피해자의 심정을 체험케 하는 등 촘촘한 예방책을 세운다 해도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는 확실하다. 체벌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가정에서의 아동에 대한 폭력을 근절하도록 사회가 노력한다면 적어도 최근의 북유럽에서처럼 학교에서의 물리적인 폭력은 감소세라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는 가해 학생들의 롤모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아이들의 상상력을 폭력적 남성성 쪽으로 이끄는 학교교육이나 대중문화에서의 군사주의적 선전에 대해 한국 사회가 스스로 성찰했으면 좋겠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을지문덕·강감찬·이순신이 대한민국의 후속세대가 정말로 보고 배워야 하는 남성성의 적합한 아이콘인가? ‘아군’이 반세기 전에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학살과 성범죄에 대해 아이들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하면 비군사적·비폭력적 세계관의 형성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각종 병영체험, 극기훈련을 시키는 것은 결국 군사적 폭력을 합리화하게 만들 수 있는 야만적 행위가 아닌가?

정말로 행복한 나라는 강병의 군국도 아니고 1인당 국민소득 6만달러의 부국도 아니다. 다르게 생기고 돈 없고 싸움을 못한다 하더라도 약자가 괴롭힘을 당하지 않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나라야말로 살기 좋은 나라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그런 나라로 ‘발전’할 수 있을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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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항암제인데 왜 여성에 부작용 더 많을까 : 과학 : 미래&과학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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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과학과학

같은 항암제인데 왜 여성에 부작용 더 많을까

등록 :2019-06-08 09:11수정 :2019-06-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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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과학기술의 젠더혁신

채용 인공지능 만들었더니
남성 구직자에게 더 유리한 결과
얼굴인식 AI는 흑인여성 인식못해
남성중심 데이터로 학습한 결과

신약 개발 과정도 남성 중심
여성에 부작용 더 많이 나타나
대장암, 심장질환 등 질병치료 때
남녀 차이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

‘과학기술은 중립적’ 믿음과 달리
여러 분야에서 남성 편향 확인돼
젠더 감수성 높이자는 ‘젠더혁신'
세계 여성연구자 중심으로 확산 중
젠더 편향 연구개발의 문제와 대안을 연구하는 ‘젠더혁신’ 제안자들은 “젠더 감수성은 과학기술의 발견과 혁신을 돕는다. 거꾸로 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때 연구 결과는 지식과 기술의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른쪽 위 사진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의 자동차 충돌시험에 쓰이는 다양한 규격의 인체 더미들이다.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젠더 편향 연구개발의 문제와 대안을 연구하는 ‘젠더혁신’ 제안자들은 “젠더 감수성은 과학기술의 발견과 혁신을 돕는다. 거꾸로 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때 연구 결과는 지식과 기술의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오른쪽 위 사진은 경기도 화성에 있는 현대기아차 남양기술연구소의 자동차 충돌시험에 쓰이는 다양한 규격의 인체 더미들이다. 그래픽 박향미 기자 phm8302@hani.co.kr,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게티이미지뱅크

▶ 인공지능, 치료약물, 로봇 등 신기술과 제품들은 많은 연구개발 단계를 거쳐 탄생한다. 생명의학의 과학 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연구개발에서 남녀 성별 차이가 균형 있게 연구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물은 성과 젠더 차이를 담지 못하고 한쪽에 편향될 수 있다. 이런 편향을 줄이기 위해 과학기술에 젠더 감수성을 높이자는 ‘젠더혁신’ 프로젝트가 한창 펼쳐지고 있다. 젠더혁신 연구자들의 연구사례들을 들여다본다.

사람의 편견 없이 인재를 자동으로 찾아낸다고 해 화제가 된 아마존의 ‘채용 인공지능’. 하지만 이 인공지능은 뜻밖에 ‘여성을 싫어하는’ 성향을 드러내 논란에 휩싸였다.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데 쓴 학습용 데이터가 대부분 남성 구직자의 지원서였고, 그 데이터로 학습한 인공지능이 남성에게 우호적인 경향을 보인 것이다. 아마존은 내부적으로 개발하던 채용 인공지능 프로젝트를 중단했다고 지난해 10월 글로벌 통신사 <로이터>가 보도했다. 얼굴을 자동으로 인식한다는 인공지능에서도 편향 문제가 지적됐다. 백인 남성 얼굴 이미지가 많이 포함된 데이터로 학습하며 패턴 인식의 지능을 갖춰 이 인공지능은 백인 남성 얼굴을 상당히 정확하게 가려냈다. 하지만 흑인 여성의 얼굴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35%나 인식 오류를 일으켰다.(2018년 국제학술지 <기계학습연구회보>) 인공지능마저 젠더와 인종에 대해 편견과 편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인공지능이 프로기사 이세돌을 누른 2016년 ‘알파고 쇼크’ 이후, 인공지능 기술은 질병 진단, 건강 관리, 개인 비서, 채용 자동화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빠르게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 하지만 중립적이며 객관적인 판단을 할 것으로 기대되던 인공지능의 일부 기능에 편향 또는 편견이 담길 수 있다는 분석과 경고도 함께 이어지고 있다. 인공지능이 학습용으로 쓰는 인간사회의 빅데이터에 이미 편향이 있고 개발자들이 짜는 알고리즘에도 무의식적으로 편향이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편향이 인공지능이라는 분야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인공지능 외에 의약품, 로봇, 자동차, 환경 등 다양한 과학기술 분야에서 남성 중심 편향이 나타난다는 문제 제기가 활발해지고 있다. ‘젠더혁신 과학기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이유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

“아마존 인공지능 사례는 젠더편향 문제가 인공지능 기술이 풀어야 할 새롭고 중요한 과제임을 드러냈죠. 어떤 기준으로 인재를 뽑을지, 그런 가치를 알고리즘에 어떻게 반영할지, 그리고 인공지능의 학습 단계에 어떤 데이터를 어떻게 보정해 쓸지 등의 문제가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 이른 아침, 조찬을 겸해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열린 ‘인공지능과 젠더 연구회’의 출범 모임에서 이혜숙(이화여대 수학과 명예교수) 젠더혁신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편향을 될수록 줄여 더 좋은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서도 젠더편향의 사례와 개선방법을 찾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공지능의 젠더편향은 근래 들어 외국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원 조이 부올라미니는 2015년 얼굴인식 인공지능이 흑인 여성인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인공지능의 편향 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난 2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우리는 종종 기계는 중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며 여러 거대기업의 인공지능 기술에 녹아 있는 편향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얼굴인식 인공지능의 오류율이 백인 남성에선 1%도 안 되지만 흑인 여성에선 35%에 달한다는 실증분석 결과를 내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알고리즘정의연맹’(AJL)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컴퓨터와 데이터 과학 분야에선 이와 관련해 널리 쓰이는 문장 하나가 있다. ‘쓰레기를 넣으면 쓰레기가 나온다’(Garbage In, Garbage Out). 현실 인간사회의 여러 편향이 담긴 빅데이터라면, 그것을 보정 없이 그대로 기계학습에 이용한 인공지능에서는 자연스럽게 젠더나 인종 편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날 모임 참석자 5명은 인공지능의 학습용 데이터 문제만이 아니라 대부분 남성인 개발자들이 설계하는 알고리즘 자체의 문제점,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이런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배경이 되는 우리 사회 내의 오랜 젠더편향 문제를 논의했다. 이들은 국내에서 서비스되는 음성비서나 자동번역 등에서 젠더편향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실제 사례를 수집해보기로 했다. 이혜숙 연구원은 “알파고 같은 바둑 인공지능은 덜 심각하겠지만, 인간사에 개입하고 인간을 대신해 예측과 의사결정을 하는 의료나 법률 분야의 인공지능에 어떤 편향이 담긴다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개발 단계에서 무의식적으로 젠더편향이 이뤄지고 있어요.”

지난달 22일 서울 강남의 한국과학기술회관에 있는 젠더혁신연구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백희영 센터장은 “과학기술의 여러 분야에서 연구자들이 별 의식 없이 이런 편향에 익숙해져왔다”고 지적했다. 젠더혁신연구센터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부설 연구소다. 젠더혁신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젠더편향은 인공지능 문제만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최근 가장 이슈가 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에 앞서 10여년 전부터 과학, 의학, 공학 분야의 여러 지식과 기술이 특정 젠더에 편향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가 이뤄져왔다. 그중 하나가 미국에서 시작된 ‘젠더혁신 프로젝트’(genderedinnovations.stanford.edu)다. 2009년 스탠퍼드대학에서 처음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의 주창자인 론다 시빙어 교수(과학사)는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연구개발 단계에서 연구자들이 성과 젠더 차이를 고려해야 사회 구성원 전체에 혜택을 주는 혁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젠더혁신의 요점”이라고 설명했다. 젠더혁신은 이제 미국, 유럽, 캐나다, 한국 등 여러 나라에서 생명의학, 환경, 인공지능, 로봇 등 수십 가지 분야의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국제 공동 프로젝트로 성장했고 반향도 이어졌다.

비만 조절 전략의 성별 차이를 연구하는 김성은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운데)와 대학원생 연구원들이 4일 실험동물 쥐를 살펴보고 있다. 이 실험에서는 성별 특성을 비교하기 위해 암수컷 쥐를 함께 사용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비만 조절 전략의 성별 차이를 연구하는 김성은 숙명여대 식품영양학과 교수(가운데)와 대학원생 연구원들이 4일 실험동물 쥐를 살펴보고 있다. 이 실험에서는 성별 특성을 비교하기 위해 암수컷 쥐를 함께 사용한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골다공증이 여성 질병이라고?

“여성과 남성은 평균 키와 몸무게뿐 아니라 호르몬, 대사, 유전적 특징에서 많은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질환의 발생, 증상, 약물 반응에서 성별 차이가 나타나는 거죠.”

문애리 덕성여대 교수(약학)는 남녀 환자들에서 나타나는 항암제 약물 반응의 성별 차이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대장암 환자에게 자주 처방되는 특정 항암제가 남성보다 여성한테 탈모나 백혈구 감소 같은 부작용을 더 자주 일으킨다는 점을 밝혀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원인을 추적한 연구진은 여성에게는 이 항암제의 독성과 관련된 특정 단백질이 적어 여성이 항암제에 더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을 동물실험으로 밝혀냈다. 그는 “이런 항암제의 약물 반응 차이는 신약 개발 단계에서 남녀 차이가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약물 부작용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연구결과는 계속 보고되고 있다. 2016년 미국과 중국 연구진은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부작용 사례 보고 시스템(FAERS)에 등록된 데이터를 분석해 부작용이 보고된 약물 668개 중 307개에서 성별 부작용 차이가 나타났다고 밝혔다.(과학저널 <사이언티픽 리포츠> 논문) 1997~2000년 미국에서 심한 부작용으로 판매 중단 조처된 약물 10개 중에서 대다수인 8개가 여성에게 더욱 위험한 부작용을 초래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김나영 서울대 의대 교수는 성별로 다른 질환의 증상과 발생 메커니즘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대장암이 주로 남성 질환으로 알려졌지만 남성보다 6~7년 늦게 나타날 뿐 여성한테도 남성 못지않게 자주 발생한다”며 “건강검진 시작과 중단 연령에선 이런 차이가 잘 반영되지 않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치료법에서도 고려할 차이점이 있다. 김 교수는 “대장암 치료가 현재 남녀별로 다르지 않지만, 여성의 경우 대장암의 발병과 진행에서 비만 요인이 위험을 높이고 여성호르몬(에스트로겐)은 위험을 낮추는 특성이 나타난다. 남녀별 치료법의 차이도 중요한 연구주제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연구결과들을 국제학술지에 발표했다.

김성은 숙명여대 교수(식품영양학)는 비만 조절 전략의 남녀 차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비만과 관련이 있는 특정 유전자의 발현이 남녀별로 다르다는 점에 착안해 성별에 따른 비만 예방과 치료 효과를 확인하는 동물실험을 진행한다. 지난 4일 오후 대학 실험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한쪽 성별 쥐만으로 실험할 때에 비해 암수컷 둘 다 쓰면 연구 규모와 비용이 크게 늘어난다. 하지만 성별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암수컷 양성 실험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별 특성을 구분하고 비교하는 연구방법은 최근 들어 생명의학 분야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다. 성별 차이를 살피지 못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의 사례가 생명의학 분야에서 가장 크게 제기돼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골다공증과 심장질환이다.

흔히 골다공증은 여성 질환으로 여겨져 남성 대상으로는 예방 교육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녀를 구분해 성별 차이를 살펴보니 남성도 조심해야 하는 질환이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실제로 남성이 골반 골절 환자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고, 증상도 여성에 비해 훨씬 나쁜 것으로 조사됐다. 거꾸로 심장질환은 주로 남성성 질환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성 심장질환 사례가 상당히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증상이 남녀별로 달라, 남성 중심으로 증상을 살피는 진단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심장질환 증상으로 여성은 남성에게 주로 나타나는 흉통 등 외에도 요통, 메스꺼움, 두통 같은 증상을 호소하지만 의사가 진료를 할 때 소홀하게 다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약개발 할 때도 수컷쥐 위주

“남녀 성별 차이를 고려한 약물 개발과 처방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신약 개발 초기 단계인 동물실험에서 대부분 수컷 동물을 사용하고 의약품 임상시험에서 남성 환자가 다수로 참여해 성별 불균형이 생기는 경우는 여전히 많아요. 이런 불균형이 나중에 약물 부작용이나 효능의 성별 차이로 나타나는 거죠.”(문애리 교수)

약물 반응과 부작용이 성별로 다를 수 있다는 인식은 자연스레 신약 연구개발 단계에서 젠더편향의 요인을 돌아보게 했다. 새로운 의약품이 탄생하기까지는 세포실험→동물실험→임상시험→의약품 허가 등의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남성 편향이 스며들 수 있다는 지적이 생명과학계에서 몇년 새 쟁점으로 떠올랐다. 세포의 성별 특성을 연구해온 이숙경 가톨릭대 의대 교수는 “기초연구에서 남성과 여성의 세포, 조직, 실험동물을 함께 쓰지 않고 남성에 치우칠 때에는 편향된 결과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며 “더욱이 이런 기초연구들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임상시험이 수행되고 그 결과를 환자에게 적용하다 보니 여성한테 약물 부작용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신약 개발의 첫 단계인 세포실험에서는 여전히 세포 성별을 구분해 비교하는 연구관행이 아직은 널리 퍼져 있지 않다. 2014년 한 연구진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미국의 세포생리학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에 성별 표기 현황을 살펴보니 여성 세포는 5%, 남성 세포는 20%, 그리고 성별 구분 없이 쓴 세포는 75%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요즘엔 세포치료술로서 줄기세포가 쓰이는데, 이 교수는 “그것이 어떤 줄기세포인지, 어떤 질병 치료에 쓰이는지에 따라 줄기세포의 성별로 인한 결과가 다를 수 있어 면밀한 세포 성별 특성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 이런 인식이 확산되면서 실험동물의 성별을 밝혀야 하고 될수록 암컷·수컷을 모두 사용해야 한다는 연구 가이드라인도 유럽, 캐나다, 미국 등에서 생겨나고 있다. 미 국립보건원(NIH)은 2016년 척추동물 이상의 동물을 대상으로 연구할 때에는 암수컷을 모두 포함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때는 그 근거를 밝히도록 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해 생명의학계의 연구방식에 변화를 모색했다. 문애리 교수는 “여성가족부 조사에서 여성의 주요 사망원인인 뇌혈관질환의 약물 임상시험에서 여성 참여율이 31%, 남성 참여율이 69%로 격차가 심한 것으로 확인된 적이 있다. 이런 차이가 나중에 약물 부작용과 효능에서 성별 차이로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봇, 자동차, 게임 등에서도

생명의학 이외 다양한 분야에서도 젠더편향의 문제가 조명되고 있다. 자동차도 그중 하나다. 자동차 충돌 안전시험에 쓰는 인체모형 인형(‘더미’)이 주로 성인 남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몸집 작은 탑승자의 안전성은 소홀히 다뤄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 지는 오래다. 이런 지적이 받아들여져 요즘에는 다양한 크기의 더미들이 충돌시험에 쓰이고 있다.

지난 4일 오전 경기도 화성에 있는 현대기아차 기술연구소의 안전시험장에는 성인 남녀, 어린이의 신체를 본뜬 다양한 규격의 더미가 160여개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짧게는 몇년, 길게는 20여년 동안 인간 탑승자의 안전을 위한 충돌시험에 사용돼 더러 긁히고 깨진 모습이었다. 연구소의 조민기 책임연구원(안전성능개발2팀)은 “미국 기업이 생산하는 충돌시험용 더미들을 쓰는데, 요즘엔 남녀 더미가 거의 비슷한 비율로 시험에 사용된다”고 말했다. 젠더분석 연구자들은 최근 임신기간에 자동차를 타야 하는 많은 임신부와 태아의 안전을 위해 충돌시험 기준에 임신부 더미도 사용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세계 자동차기업들에서 임신부 더미는 아직 실제 안전시험에 쓰이지는 않고 있다. 조민기 연구원은 “임신부 더미도 갖추고 있지만 아직 임신부에 관한 충돌시험 기준이나 제도가 없어 실제 시험엔 활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로봇 분야에서도 젠더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젠더혁신 프로젝트’ 자료는 로봇 디자인 단계에서 여성 청소 로봇이나 남성 경찰 로봇처럼 남녀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무의식적으로 투영되면 젠더 고정관념이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들은 로봇 디자인의 젠더에 관한 고민이 연구개발 단계에서 연구자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남녀가 모두 좋아할 게임을 개발하는 일도 젠더혁신 연구자들의 관심사다. 지난 50여년 동안 비디오게임 개발자나 사용자가 주로 남성이었고 이에 따라 비디오게임이 남성적인 것이 되었다고 이들은 진단한다. 해외의 게임 관련 젠더혁신 사례 발표를 들은 적이 있는 임소연 숙명여대 연구교수(글로벌거버넌스연구소, 과학기술학)는 “비디오게임들을 실증적으로 조사분석해 남녀 아이들이 모두 좋아할 만한 게임 특성을 찾아내고 남녀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유연한 게임을 만들자는, 즉 게임의 젠더 다양성을 높이자는 프로젝트인데, 새로운 젠더 정체성을 찾아보자는 점에서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이밖에 도시계획, 재난대응, 노인복지와 음성인식 같은 주제에서도 성과 젠더 차이를 분석해 남녀 모두에게 성별 특성에 맞춘 기술을 찾아가는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다.

세계의 젠더혁신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국제회의인 ‘젠더혁신 서밋’이 2015년 8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이 행사를 계기로 이듬해인 2016년 국내에서도 젠더혁신연구센터가 설립됐다. 젠더혁신연구센터 제공
세계의 젠더혁신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국제회의인 ‘젠더혁신 서밋’이 2015년 8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이 행사를 계기로 이듬해인 2016년 국내에서도 젠더혁신연구센터가 설립됐다. 젠더혁신연구센터 제공
국내에서도 활발해지는 움직임

젠더혁신 프로젝트는 과학기술의 젠더균형 연구방법에 초점을 두고 있어, 직접적으로 남녀 사이의 불평등 문제를 다루는 페미니즘과는 조금 다른 갈래라고 평가받는다. 그렇더라도 젠더혁신은 페미니즘의 오랜 역사 속에서 생겨난 과학기술 연구자들의 움직임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역사적으로 페미니즘에는 여러 갈래가 있었죠. 크게 보면, 남녀 평등을 말하는 페미니즘은 남녀가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갈래로, 남녀는 본래 다르기에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시됩니다. 젠더혁신은 ‘주류 과학’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과학의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남녀 성별 차이가 세심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죠.”(홍찬숙 서울대 여성연구소 책임연구원, 사회학) 그는 “연구개발 단계에서 지식과 기술의 성평등을 지향하는 논의”라고 보았다.

사실 젠더혁신 연구자들은 기존의 연구결과들에서 여성이 실제보다 적게 대표되는 문제(과소대표)가 있음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젠더평등과 맞닿아 있다. 백희영 센터장은 “남녀 차이를 고려하지 않으면서 실제로는 무의식적으로는 남성이 대표되는 지식과 기술이 생산돼왔다. 성과 젠더 차이에 주목해야 세계의 다양성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래야 객관적인 지식과 기술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문제의식이 국내에서도 확산됨에 따라 과학기술의 연구현장에서 젠더 감수성을 높이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젠더혁신연구센터는 2017년 세계 각지 실험실에서 쓰이는 세포주 6000여종의 성별 표시를 일일이 확인해 만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연구자들이 실용적으로 쓸 수 있도록 한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연구개발에서 성별 특성이 고려돼야 한다는 것을 명문화한 ‘국가과학기술기본법’ 등 법률 개정안들이 국회에 제출돼 있다. 아직 낯설지만 의과대학에서도 젠더와 질환을 다루는 수업이 등장했다. 지난해 8월 의대 본과 2학년생 수업에서 ‘성차 의학’ 과목을 처음 개설한 김나영 서울대 의대 교수는 “환자가 느끼는 통증, 증상, 치료와 약물 반응 등을 남녀 차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수업을 열었는데 반응이 좋아 올해에도 같은 수업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백 센터장은 “지금까지 국내에서도 생명의학, 도시계획, 환경, 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젠더 감수성을 높인 연구사례를 쌓아왔는데 앞으로 인공지능이나 스마트 건강의료와 같은 정보기술 주제에서도 젠더 이슈가 커질 듯하다”고 내다봤다.

오철우 선임기자 cheolwoo@hani.co.kr

성과 젠더: 성(sex)은 유전자와 생리학 같은 생물학적 특성에 의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며, 젠더(gender)는 남성·여성과 연결된 사회문화적 특성을 표현한다. 예컨대 통증 신호의 생리학에서는 성 차이가 존재하고, 통증을 보고하거나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식에서 젠더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 성과 젠더 차이를 인식하고 비교하는 연구방법을 과학기술 연구에 도입하자는 제안. 과학기술 연구물에 남성 중심의 편향이 스며들어 있다는 진단과 함께 2009년 미국에서 시작됐다. 젠더혁신을 통해 기존 과학지식과 기술에 없던 새로운 발견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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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았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

등록 :2018-10-25 20:08수정 :2018-10-25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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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문학상 수상자 리처드 포드
배스컴 시리즈 ‘독립기념일’ 번역
백인 중산층 남성의 불안과 슬픔
독립기념일 1, 2
리처드 포드 지음, 박영원 옮김/문학동네·1권 1만4500원, 2권 1만5500원

“떨어지는 집값이 무색무취의 안개처럼 나무 사이를 타고 바람 한 점 없는 공기중에 스며들고 있다.”

<독립기념일>의 도입부, 해덤이라는 마을에서 연이은 변고가 일어난다. 소설의 화자인 마흔네 살 된 이혼남 프랭크 배스컴이 퇴근길에 괴한들로부터 병으로 머리를 가격당했고, 두 집에 도둑이 들었으며, 프랭크와 부동산중개소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가 강간살해당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 간단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지만 공개시장에서의 부동산 가격 하락은 한 마을에, 또 한 지역 주민의 정서에 중요한 무언가를 의미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를 옥죄는 낙관주의가 있다. 우리의 걱정거리는 진짜가 아니라는, 그것은 적어도 각자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이므로 누구의 문제도 아니다,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주문.
<독립기념일>의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가 25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경리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독립기념일>의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가 25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경리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프랭크는 아들과 주말여행을 떠나려는 참인데, 최근 교제 중인 샐리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이상한 꿈을 꿨다고. “분위기는 평화로웠는데 전체적으로 엄청, 엄청 분주하고 어수선했어. 아무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분위기 말이야. 그런 불안감을 바로 내 꿈에서 느꼈지.” 이 꿈은 전조가 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리처드 포드는 1944년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에서 태어났다. 이름부터 포드인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미국 백인 지식인 남성성을 탐색하는 필립 로스와 미국 서부 백인 남성성을 폭력의 연대기로 담아낸 코맥 매카시가 1933년생, 미국 소도시, 중산층 백인 남성을 통속성으로 파악하려 한 존 업다이크가 1932년생인데, 포드를 잘 모른다 해도 이 세 작가에 관심이 있다면 <독립기념일> 독서는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넷 다 자신의 문학적 페르소나를 주인공으로 대작(필립 로스의 미국 3부작, 코맥 매카시의 국경 3부작, 리처드 포드의 배스컴 4부작, 존 업다이크의 토끼 4부작)을 발표하며 이정표를 세웠는데, 리처드 포드의 프랭크 배스컴은 그 중 가장 ‘보통의 인간’ 형이다. 여기서 보통의 인간이라 함은 미국인이고, 백인이며, 남성이며, 지식인일 것을 기본으로 요구한다.

<독립기념일>의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가 25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경리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독립기념일>의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가 25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경리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독립기념일>은 <스포츠라이터>(1986)에 이은 배스컴 시리즈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다. 배스컴은 포드와 마찬가지로 스포츠 기자 경력을 가진 소설가라는 설정이다. 첫아들의 죽음과 이혼을 경험하며 지금은 부동산 중개인으로 일하고 있다. 둘째 아들(이제는 하나뿐인 아들)은 전처와 살고 있는데, 최근 슈퍼에서 콘돔을 훔치다 걸려 몸싸움을 벌여 독립기념일 바로 다음날 재판을 받게 되어 있다. 그리고 아들과 독립기념일 주간을 여행으로 보내려는 배스컴은 이 여행이 마지막이 될 듯한, “아들의 인생에서 중요한 한 시기가, 완전히 닫히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만화경 속 그림처럼 좁아지거나 뒤틀리는 순간”이 다가올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꿈 혹은 어떤 기묘한 예감의 형태로 찾아오는 전조는 현실에서 이루어진다. 그 과정을 포드는 섬세하게 담아낸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고 엉망진창이 됐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독립기념일>의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가 25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경리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독립기념일>의 미국 작가 리처드 포드가 25일 낮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박경리문학상 수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토지문화재단 제공

부동산 중개업자라는 주인공의 직업은 삶을 철학이나 관념으로만 파악할 수 없게 만들며,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집을 사고 파는 과정에서 누구나 꿈과 이상을 구체적인 액수의 돈의 형태로 환산하게 되니까. 아들에게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떠난 여행은 살인사건에 의해 시작하자마자 불안에 휩싸인다. 나에게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나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을 간접체험하는 작업이 독서의 기능 중 하나라면, ‘괜찮아’라는 주문을 외우며 봐야 할 것을 가능한 한 보지 않기를 선택하고 살아가는 일상적 생활인의 내면에서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소설이다.

다 끝났다는 것을 알아도 파국의 파국이 오기 전까지 끊어내지도 떠나지도 못하고 일상의 다른 기능적인 일에 충실한다. 부모로서의 역할, 애인이나 배우자로서의 역할,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에 매달리며 먼 곳을 쳐다본다. 말과 행동으로 싸우지 않고 (가장 가까이서 불행 혹은 고민을 제공하는 이들에게) 생각으로만 저항한다. 그 매일매일에 슬픔이 가득 고인다. “당신은 결코 죽지 않았지만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산다.”

이다혜 작가, 북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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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 남자로 살지 않으려면

등록 :2019-06-14 06:00수정 :2019-06-1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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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치료 사례로 화난 남자 다뤄
“화가 났다는 것 모르는 남자 많아”
화나게 한 이유 남자 내면에 있어
“시대에 맞는 남자의 역할 수용해야”
비욘드 앵거
토머스 J. 하빈 지음, 김소정 옮김/교양인·1만6000원

자가 진단을 해보자. 분노를 측정하는 ‘분노 지수 자가 진단표’로, 레이먼드 노바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심리학과 교수가 개발했다. 문항에 화가 나거나 약이 오르는 정도를 ‘거의 안 난다’(1점)에서부터 ‘아주 많이’(5점)까지 점수로 매기는 방식이다. 문항은 “식당에서 종업원을 기다리고 있다. 15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 물 한 잔 가지고 오지 않았다” “한참 논쟁을 하다가 상대방이 나에게 ‘멍청한 자식’이라고 욕을 했다” 등 모두 80개인데, 다들 열받게 하는 상황들이다. 점수를 더해 구한 총점에 따라, ‘분노 조절을 잘하고 있는 것이니 분노 때문에 문제될 일은 없다’(220점 미만), ‘아주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수준이다’(220~280점), ‘아주 심각한 수준으로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한다’(280점 이상)로 결과가 나온다. 점수를 매겨 더하니 242점. 즉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니 일단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여자보다 훨씬 폭력적이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와 달리 자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조절할 의지가 크지 않다. 출처 게티이미지 뱅크
남자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여자보다 훨씬 폭력적이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자와 달리 자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조절할 의지가 크지 않다. 출처 게티이미지 뱅크
<비욘드 앵거>는 화가 난 남자들을 다룬 책이다. 저자인 토머스 하빈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화가 난 남자들을 상담하고 치료해온 임상심리학자다. 자신의 경험과 상담·치료를 했던 분노한 남자들의 사례들을 통해 화가 난 남자들의 특징과 분노가 일으키는 파괴적 결과들을 설명하고, 화가 난 남자로 살지 않으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개인한테도 문제지만 “남자가 훨씬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한, 분노한 남자들이 일으키는 문제는 사회 구성원 전체에 엄청난 타격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자가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은 여자보다 폭력적이다. 그런데도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와 달리 자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조절할 의지가 크지 않다.”

저자는 화를 내는 것과 화가 나 있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항상 화가 나 있는 사람, 그리고 분노가 표출되는 방식이 문제다. 그런데 “화가 났으면서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모르는” 남자가 많다고 한다. “너무 오랫동안 화를 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분노가 표현되는 모습은 다양하다. 화를 퍼붓는 남자, 꾹꾹 참는 남자, 끊임없이 투덜대는 투덜이,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는 법 없이 남의 잘못을 지적질하는 남자…. 가장 불행한 유형은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다.

화가 났으면서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모르는 남자들이 많다. 너무 오랫동안 화를 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출처 게티이미지 뱅크
화가 났으면서 자신이 화가 났다는 것을 모르는 남자들이 많다. 너무 오랫동안 화를 내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자기 감정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출처 게티이미지 뱅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화가 늘 논쟁으로 바뀐다면 화가 나 있는 것이며, 입에 욕을 달고 사는 것도 화가 나 있다는 뜻이다. 가족과 잘 지내지 못하고, 친한 친구가 아주 적거나 전혀 없고, 만나자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아마도 분노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직장이나 사교 모임에서 지나치게 경쟁을 하거나, 비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거나,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완벽주의자라거나, 제대로 쉬지를 못하거나, 자기 의견보다 다른 사람의 견해가 더 타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다면 역시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다.”

화가 난 남자를 살펴보면 가족의 모든 남자가 분노 조절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화난 아버지가 화난 아들을 만든다. 도발적으로 변하는 사회도 화를 북돋운다. “모든 일에서 ‘상대’를 이기고 모욕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문화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분노를 부추긴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생각에는 내가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가까이 있다. “두려움은 특히 분노 문제가 있는 남자들을 강타한다. 이 두려움은 강렬한 수치심을 유발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조차 절대로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화가 난 남자들은 자신의 약한 면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는 감정을 죽이고, 자제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기가 상황을 통제해야만 강하다고 느끼고 불안을 숨길 수 있는 탓이다. 그래서 낯선 사람이나 상황을 꺼리는데, 이는 열등감의 표현이다. 가족을 통제하는 데 특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남들의 적절한 비판을 엄청난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부정적인 부분을 찾아내서 강조하고 긍정적인 부분을 피하고 축소한다.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기를 꺼린다.

화가 난 남자들은 타협의 기술도 없다. “화가 난 남자들은 아내나 여자 친구가 두 사람 사이의 문제를 의논하려고 이야기를 꺼내면 자기를 비난한다고 느끼고 곧바로 방어 태세를 취한다. 방어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 번째 반응은 성급하게 말다툼을 하는 것이다. (…) 두 번째 반응은 침묵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자기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실망하고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입을 닫는 남자들이 많다. 그들은 한 번 침묵하면 며칠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화가 난 남자들은 주로 여자들을 공격한다. 힘의 차이가 크다. “여자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여자들이 남자의 행동을 참고 견딜 때가 많다는 데 있다.” 남자의 분노 때문에 가장 심하게 고통을 겪는 사람이 곁에 있는 여자들이다. “화가 난 남자 곁에 있는 여자가 가장 분명하게 알아야 할 점은 남자가 화를 낸다고 해서 자책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남자의 비위를 맞추려 하면 남자는 마음껏 화를 내며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 된다. 저자는 남자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여자의 노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남자를 화나게 하는 이유는 남자의 내면에 있기 때문에 남자만이 바꿀 수 있다.”

저자는 자신에게 분노 문제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자신을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하루에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나무라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이밖에도 자기 감정을 털어놓으려 노력하고, 가족 내에서 맡은 역할을 거부하는 등 여러 조언을 한다.

무엇보다도 유연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남자다움, 남자의 일, 남성성의 개념은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 맞지 않는다. 한때는 두 성 가운데 한 성에만 부여했던 권리와 의무들을 이제는 공평하게 나눌 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다.” 많은 남자들에게 이런 변화는 당혹스럽고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새로 정의된 남자의 역할을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게 되고 화도 덜 날 것이다.”

황상철 기자 roseb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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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생 김지훈’은 어떻게 1000만원 넘는 후원을 받았나

등록 :2018-04-15 05:01수정 :2018-04-15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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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딩 1주일만에 1000만원 돌파
“불행해진 이유를 잘못된 원인으로 돌려”
“차라리 ‘왜 지훈이는 괴물이 되었나’라는 책 나왔으면”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는 1주일만에 1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모았으나, 진행자의 요청으로 취소됐다. ’크라우디’ 누리집 갈무리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는 1주일만에 1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모았으나, 진행자의 요청으로 취소됐다. ’크라우디’ 누리집 갈무리
‘남성역차별 시대 남성인권을 위한 책’을 표방한 책 ‘90년생 김지훈’은 등장부터 화제였다.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82년생 김지영>에 대항하는 듯한 제목과 내용을 담아 이목을 끌었고, 여러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펀딩을 거부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입소문을 탔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는 시작 1주일만에 목표액 300만원을 훌쩍 넘은 1000만원을 달성했다.

목표액은 초과 달성했지만, 책 ‘90년생 김지훈’은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90년생 김지훈’ 펀딩 진행자라고 밝힌 ‘카광’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90년생 김지훈’과 여성의 관점에서 쓴 ‘1990년, 백말띠의 해’라는 두 책을 동시에 펀딩받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남성인권 책, 페미니즘 책 두 개의 프로젝트를 열고 서로 상반되는 의견을 동시에 펼쳐보고 싶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모욕과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라며 프로젝트 취소 이유를 밝혔다.

출판되진 않았지만, 1000만원이란 후원 금액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대체 왜 많은 이들이 ‘90년생 김지훈’에 공감한 걸까. ‘남성역차별 시대’라는 이들의 주장은 타당한 걸까. 책 <도둑맞은 페미니즘>의 역자 김성준 씨,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오찬호 씨와 ‘90년생 김지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남성들이 삶이 힘들어진 원인을 잘못된 방향으로 돌리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펀딩 프로젝트에 올라왔던 ‘90년생 김지훈’ 목차
펀딩 프로젝트에 올라왔던 ‘90년생 김지훈’ 목차
-‘90년생 김지훈’에 1000만원 이상 모인 점에 놀랐습니다. 목표액의 3배가 넘습니다. 왜 ‘90년생 김지훈’이 이렇게까지 호응을 얻었을까요.

=오찬호 “2가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사회의 흐름이 굉장히 변하고 있는데 그걸 인지하지 못하는 남성이 많다는 거죠. 한편으론, 여성주의의 전략이 2030 남성들을 설득하는 덴 부족했다고도 볼 수 있죠. 운동이라는 건 전략이 필요하고, 결국 일상 속에서 타협하는 과정을 통해 저변을 넓히는 거잖아요. “뭐야, 찌질하네” 이렇게만 볼 순 없고, 이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지점도 생각을 해봐야겠죠.”

=김성준 “‘90년생 김지훈’ 쪽 주장은 미국과 유럽에서 부상하고 있는 극우 포퓰리스트의 주장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자신들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 이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이유를, 신자유주의적 개혁 같은 구조적 변화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나 이민자, 소수인종 등 사회적 약자에게서 찾고, 그들에게 분풀이를 하는 점이 전형적이죠.”

-‘90년생 김지훈’ 프로젝트에 담긴 내용을 보면 “사회적 약자는 빈부나 강제적 권력에 의해 결정되는 양상이 있으며 단순히 여성이라는 조건 하나만으로 약자일 순 없다”면서 “(남자는)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2년을 희생했다”, “(우리는) 남자라서 양보하고, 남자기에 무거운 것을 들어야 한다며 크고 작은 차별을 수도 없이 받으며 참고 자란 세대”라고 말합니다.

=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급격하게 경제적·문화적 주도권을 상실한 일부 백인들과 마찬가지로 ‘90년생 김지훈’과 그 지지자들 역시 ‘우리는 억압당하고 있다’는 서사를 강조합니다. 사실 자신들의 삶이 과거에 비해 불행해진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지목하지 못하는 거죠. 백인들이 불행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흑인이나 이민자, 여성들이 백인 남성들의 일터를 뺏어서는 아닐 겁니다. 마찬가지로 이른바 ‘헬조선’에서 남자들의 삶이 불행해진 이유가 여성들이 남자들에게 무슨 일을 저질러서는 아닐 거라고 봅니다.”

=오 “솔직하게 말하면 참신한 주장이 없었어요. 남성들이 여성과 대립하거나 억울하다고 할 때 늘 뱉는 말이랄까. (남성들 입장에선)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 살얼음판에 있는데 (남성을 비판하는 건) “생뚱맞다”는 시각도 있을 수는 있죠. 페미니즘은 긴 역사의 맥락 속에서 그 시각을 그려내왔는데, 젊은 친구들한텐 (그 맥락이) 가슴에 와닿지 않는 거예요. 최근 몇 년 사이에 거의 남성에 대한 비판이 강도높게 폭발하다 보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테고요.”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 이미지 갈무리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 이미지 갈무리
-‘생존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는 상황도 영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쟁에서 낙오될 것 같은 불안함이나 두려움에 대한 화살이 여성에게로 향하는 것 같아요.

=김 “그동안 남성으로 살아가면서 기대할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국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거나 결혼상대를 만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죠. ‘보통의’ 남자라면 아내보다 많은 돈을 벌면서 당당하게 가정을 이끌어나가야 한다는 고정된 성역할에 대한 강요는 여전한데, 이걸 실현하기 위해선 점점 더 ‘비범한’ 능력이 필요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젊은 남성이 구직시장이나 구혼시장에서 낙오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나 불안감에 생각을 지배받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오 “군대를 이야기할 때 항상 나오는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도 비슷합니다. 과연 여자가 군대를 간다고 하면 (군 복무가) 짜증이 안 날까요? 남자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는게 핵심인 거죠. 그런데 마치 ‘고통의 평준화’가 되면 짜증이 안날 것처럼 바라보는 거예요. 비판할 지점에 대한 취사선택이 잘못된 거죠. 억울함의 원인이 여성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요.”

=김‘왜 낙오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사회변혁을 향한 요구로 발전시키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은 던져 볼 필요가 있죠. 많은 남성분들이 ‘고용 없는 성장’과 ‘모든 일자리의 비정규직화’, ‘유연한 착취’ 등을 기조로 하는 경제구조를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제 구조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못하다보니, 여성들에게 원한을 표현하는 남자들이 늘어나는 거죠. 정작 고용을 점점 줄이고 정규직 일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업주에게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성을 학교와 구직시장에서 몽땅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과거의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어요.

-‘잘나가는 여성’에 대한 공포심도 존재하는 걸까요? 언론은 일부 여성이 공무원 시험이나 고시 등에서 합격하면, ‘여풍’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를 해요. 사실 전체 비율을 보면 여성이 실제로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기 보단, 전년 대비 여성 수가 늘었거나 수석합격자 중에 여성이 있는 것일 뿐인데도 말이죠.

=김 “<도둑맞은 페미니즘>의 저자 니나 파워도 지적하듯이, 사실 일부 여성 합격자들의 존재가 전반적인 여성의 지위 향상을 의미한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저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여성인 합격자가 있다”는 사실뿐이죠. 왜 우수한 여성지원자들이 이렇게 정량적인 평가로 사람을 채용하는 전형에 지원하는지, 구직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다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 주목하는 기사는 굉장히 드뭅니다. 피상적인 방식으로 ‘여성의 약진’을 다루다보니 실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는 정도에 비해, 과도하다고 할만큼 남성들이 두려움과 불안감을 내비치는 것 같습니다.”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는다고 밝혔다가 거센 악플을 받은 이른바 ‘아이린’ 사태도 흥미로웠죠.

=오 많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 하는 여성은 굉장히 못생기거나 뚱뚱하고 자격지심이 있는 여성인 것처럼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어냈어요. 소위 ‘루저’같은 모습인거죠. 그런 사람들하고는 논쟁해서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아이돌 가수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그런 이미지가 아닌 남성들이 평소에 소비하던, 자신들이 보기 좋아하는, (아름다운) 여성인 거예요. 그런 여성이 성차별을 다룬 책을 읽었다고 하니까 괴리감을 느낀 거죠.”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 이미지 갈무리
‘90년생 김지훈’ 펀딩 프로젝트 이미지 갈무리
-가부장제나 강인한 남성성을 강조하는 사회에선 사실 남성들도 피해자잖아요. 그러한 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페미니즘에 남성들이 강하게 반발하는 게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김 “네, 가부장제의 변혁은 남성들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겁니다. 연봉을 넉넉하게 잘 주는 정규직 일자리를 얻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해야 한다는 소위 ‘평범한’ 삶의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해서 더 이상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고 느낄 필요도 없게 됩니다. 하지만 체제에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여성들과 자원을 나누는 걸 거부하는 게 더 쉬운 길이라고 여기는 거죠. 여성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책임회피를 하고 싶은 마음도, 세상은 변하지만 여성들만은 자신의 ‘상냥한 아내나 어머니’로 남아있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겁니다.”

=오 만약에 ‘90년생 김지훈’이란 책이 ‘왜 지훈이는 괴물이 되었나’라는 방향으로 간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초점을 잡았어야 합니다. 남자라고 일을 더 부여받고, 남성성을 요구 당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봐야 하는 거죠.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어요. 군대는 ‘강한 남성성’을 기반으로 돌아가는 조직이잖아요. 군 복무가 억울하다고 하지만, 군 복무 기간을 줄이자고 하면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이 더 반대해요. 그 남성성을 기반으로 담합하는 문화가 있기 때문이죠. 지금 한국사회는 조직 내에서 ‘남성성’이 발현될 수 있는 기회를 얻어야 위로 올라갈 수도 있고요. “최소한 20개월은 있어야 남성성을 기를 수 있는 것 아닌가” 내심 이렇게 생각해요. 오히려 “왜 권력은 남성성이 강할수록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데 말이죠.

-‘90년생 김지훈’은 지하철 ‘임산부 전용좌석’ 등을 언급하며 ‘역차별’이란 논거를 내세웁니다. 이미 성평등한 사회에서 왜 여자만 배려해줘야 하냐는 주장이죠.

=오 “‘임산부 전용좌석’이나 ‘여성전용칸’ 등을 정책적으로 봤을 땐, 100% 긍정적일 순 없겠죠. 그 정책이 실효성이 있냐고 물을 순 있어요. 정책적으로 보면, ‘여성전용칸’은 책임이 마치 여자에게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시민의식이 실제로 높아져야 하는 문제인데 마치 ‘펜스룰’처럼 구분하자는 정책이죠.

하지만, 남성들이 과연 그 ‘임산부 전용좌석’으로 인해 ‘인간으로서 존엄한 권리’가 침해됐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동을 못하게 되나요? ‘여성전용칸’을 예로 들면, 그동안 지하철에서 이뤄져왔던 성추행 사례 다수가 남자가 여자에게 하는 거잖아요. 수십년동안 수많은 여성들은 출근할 때도 존엄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했어요. 여성은 지하철을 타고 몇 역을 가는 것마저도 공포심을 가졌던 거죠. 그러한 수모를 겪지 않을 자유가 있는데 (여성전용칸은)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는 걸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역차별’이란 말이 너무 시도때도 없이 등장하는데, 이런 문제에선 사실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요.”

-저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서 20대가 자기계발 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2년제와 4년제를 차별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현상을 설명했습니다. 구조적인 원인은 바라보지 않고, 모든 걸 개인의 잘못으로만 환원한다고 말씀하셨죠. ‘90년생 김지훈’ 속 주장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출산·양육과 일을 병행해야 하는 점이나 회사 내의 직무 차별을 언급하는 대신, 일단 “여자는 야근을 안 한다”라며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겁니다.

=오 “그동안 소위 ‘성공한 여성’으로 포장돼온 사람들의 삶이 상품화된 부분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요. “여성이 못할 것 없다”, “여성들이 남성처럼 하면 남성 못지 않다”는 ‘슈퍼우먼’같은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상품성을 얻었죠. 분명 생물학적 차이도 존재하는데, 마치 누구나 노력하면 유리천장을 뚫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의 발언이 오히려 사회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친 부분도 있다고 봐요. 어떤 여성의 자기계발서를 봤는데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맡기면 된다. 또는 돈을 들여 ‘베이비시터’를 들이면 된다”는 식으로 서술해요. 이 과정에서 ‘돌봄노동의 사회화’ 같은 의제는 묻히고 어떻게든 개인 또는 가족 내에서만 극복하려는 분위기가 되죠. ‘의지의 한국인’이라고 말하는데 그게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요소인거죠.

=김 “여자들이 야근을 회피하니까 성공하지 못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여성들이 늦은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걸 회피하는 이유에 대해 묻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또 남자들이 밤늦게까지 야근을 할 때, 집에서 아이를 돌보게 되는 사람은 누구인지 묻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생리나 출산, 육아에 드는 비용과 노력을 사회가 아니라 여성 개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풍조가 있어요. 사회가 책임을 성별에 따라 선택적으로 할당하는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차별’에 예민한 건 ‘공정’이란 가치를 유달리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분위기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오 ‘반칙’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 봅니다. 물론 “그게 정말 반칙인가?”란 질문에서 시작해야 하지만요. 지금 젊은 친구들은 ‘무임승차’와 같은 개념에 익숙해요. ‘금수저’, ‘흙수저’라는 표현도 결국 경쟁이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 예전처럼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은 사라진 사회를 반영한 거잖아요. 그런 패러다임에 익숙하면, 주변의 많은 일들이 다 반칙처럼 보일 수 있죠. 누군가는 특혜를 받는 것 같고, 노력도 안 했는데 얻어가는 것 같고….

평창겨울올림픽 때 남북아이스하키 단일팀 논란 때도 그랬잖아요. 사실 올림픽 자체가 평화를 위해서든, 지역발전을 위해서든 국가가 개입하는 스포츠잖아요. 이벤트성으로 봐도 되는데 젊은 친구들은 마치 수능을 위해 달려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이입한 것 같아요. 수능 당일날 아침에 불공정한 일이 벌어진 것과 마찬가지인 거죠. 그 안에서 ‘능력주의’도 드러나요. 실력이 안 되는 팀하고 섞는다는 것 자체를 북한팀이 특혜를 보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스포츠에 비유된 인생에 익숙한 세대인 것 같습니다.”

=김 “지금 시급한 건 한국의 젊은 남자들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사회변혁을 향한 요구로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언어입니다. 이미 한국의 남초 커뮤니티들이나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페미니스트를 공격하는 극우 포퓰리스트들의 강연이나 트윗들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찬성조로 언급되는 것을 여러 차례 지켜보았어요. 책 <도둑맞은 페미니즘>에서도 썼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등장한 극우 포퓰리스트 세력이 단순히 해묵은 인종차별 발언이나 여성혐오 발언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 시민적 자유나 인권, 법치, 평등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마저 경멸하고 부정한다는 사실에는 특별한 주목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여성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한 그나마의 제도적, 정책적 마지노선 역시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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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캡틴 마블’과 나이키의 도발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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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편집국에서] ‘캡틴 마블’과 나이키의 도발

등록 :2019-03-06 17:56수정 :2019-03-0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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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광고. 유튜브 갈무리
나이키 광고. 유튜브 갈무리

“내가 왜 당신에게 나를 증명해야 하지?”

6일 개봉한 마블 스튜디오의 최신작 <캡틴 마블>의 마지막에 주인공 여성이 스승에게 던지는 이 대사는 함축적이고 강렬하다. 더 이상 남자들의 눈에 드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증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최근 유튜브에 공개된 나이키 광고는 정확히 이 대사를 1분30초의 역동적인 영상으로 풀어냈다. 운동을 갓 시작한 어린 선수들부터 서리나 윌리엄스 같은 톱스타 선수까지 숨가쁘게 등장하는 이 광고의 내레이션을 줄여 소개하면 이렇다. “우리가 감정을 드러내면 호들갑스럽다고 한다. 우리가 남자들과 대결하고 싶어하면 ‘또라이’(nuts)가 된다. 우리가 (심판에게) 반박하면 불안정하다고 하고, 우리가 너무 잘해도 뭔가 이상하다고 하고, 우리가 화를 내면 신경질적이라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다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미쳤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에는) 마라톤을 뛰는 여자들도 미쳤다고 했고, 복싱을 하는 여자도, 덩크슛을 하는 여자도 미쳤다고 했다. 그러니 누가 네게 미쳤다고 해도 괜찮아. 미친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보여줘.”

이미 한국 티브이 광고에서 여성들이 젠더 스테레오타입에서 벗어나 치열하게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줘 호평을 받은 나이키지만 이 광고는 ‘너의 위대함을 믿으라’는 메시지에서 성큼 더 나가 ‘남성들의 시선에 갇혀 너를 증명하려고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내보인다.

페미니즘 학자도 아니고 여성주의 사회운동가는 더더욱 아닌, 글로벌 자본주의의 첨병인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와 스포츠 브랜드 광고가 이렇게 앞서 나갈 수 있다니 놀랍다. 사실 나이키 광고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다고 굳게 믿어온 내 안의 편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경기에 지고 눈물을 많이 흘리는 여성 선수를 보면 속좁은 여자 같다고 비난했고, 남자처럼 싸우고 남자처럼 항의하는 서리나 윌리엄스를 보면서 너무 거칠다고 비난했다. 물론 나도 할 말은 있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단지 여자라 입사에서 탈락하고, 아이를 낳아서 승진에서 탈락하고, 남자 직원이 많기 때문에 여성 임원은 필요없는 존재인 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남성=권력인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은 남성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여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한 줄타기를 해왔다. 주로 남성인 상사나 업무 파트너에게 연락을 할 때는 언제나 “바쁘실 텐데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이라는 굽실 멘트로 시작했고(나도 바쁜데!!), 일 못하는 동기 남성이 나보다 먼저 승진해도 ‘그까이꺼 괜찮아’라는 쿨내를 풍겨야 이듬해 승진이라도 기약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여성 심리학자가 쓴 <내 안의 가부장>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여성 안의 여성성도 남성성도 자체 검열하고 부정하게 된 여성의 내면화된 가부장성을 지적한다.

지금도 나는 “바쁘실 텐데 방해해서 죄송하지만”이라고 이메일을 시작하고, 많은 회사의 남성 상사들은 ‘공손하면서도 쿨한’ 여직원을 요구한다. 나이키 광고 댓글에도, <캡틴 마블> 평점에도 구시대 잔류파들의 안쓰러운 ‘총공’이 진행되고 있지만 세상의 도저한 흐름은 막을 수 없어 보인다. 트렌드와 돈의 움직임에 기민한 할리우드와 광고계가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 <캡틴 마블>의 예매율이 하늘을 찌르고 나이키 우먼스의 광고도 멈춤 없이 이어진다는 게 그 증거다. 그리고 구글은 나처럼 ‘죄송하다’를 달고 사는 여성들의 불필요한 습관을 고치기 위해 겸양의 구절을 쓰면 잘못된 맞춤법을 지적하듯이 빨간색 밑줄로 강조하는 지메일 확장 프로그램 ‘미안하지 않아’(Just not sorry)를 개발해 제공한다. 이제 이십년 습관을 고칠 때도 됐다.

김은형 문화에디터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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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O 사진 볼 사람” 장난처럼 불법촬영물 돌려보는 남성들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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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여성

“OOO 사진 볼 사람” 장난처럼 불법촬영물 돌려보는 남성들

등록 :2019-03-12 14:39수정 :2019-03-12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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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 여자친구 불법촬영해 페이스북에 “사진 볼 사람” 제안했다 체포
고등학생들, ‘500원에 살래?’ 같은 학교 학생 불법촬영물 공유 정황도
“불법촬영물 공유, 일부 연예인 문제 아닌 왜곡된 남성문화 문제”
가수 정준영이 2016년9월25일 서울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에서 여자친구의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것과 관련해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수 정준영이 2016년9월25일 서울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에서 여자친구의 신체 일부를 몰래 촬영한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것과 관련해 입장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아무개(21)씨는 지난 8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4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를 위반한 혐의로 서울 강동경찰서에 긴급 체포됐다. 전씨는 여자친구를 포함해 지인, 불특정 행인들까지 여성들을 무차별 불법 촬영하고, 여성의 특정 신체 부위를 확대해 갈무리한 사진 등도 다량으로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전씨는 지난해 12월 여자친구 몰래 페이스북에 ‘OOO(여자친구 이름) 사진 볼 사람’이라는 글을 올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인들과 불법촬영물을 공유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다. 현재 경찰은 디지털 포렌식 등의 방법으로 전씨의 휴대전화 등을 조사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도 불법촬영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던 ㄱ군이 같은 학교 여학생들을 불법촬영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한겨레> 취재결과, ㄱ군은 불법촬영 의혹에 대해 “직접 찍은 게 아니라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불법촬영물을 직접 찍은 것처럼 속여 친구들에게 자랑한 것뿐”이라고 해명했다. 직접 찍은 것이든 아니든 10대 남성들 사이에서 불법촬영물이 ’자랑’거리로 통용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ㄱ군의 같은 반 친구는 “불법촬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500원에 살래?’ 같은 말이 공공연히 오갔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학교 쪽에서 실제 같은 학교 학생의 뒷모습을 촬영한 사진 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해당 학교는 현재 ㄱ군에 대해 학교폭력 대책 자치위원회 등의 절차를 밟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12일 최소 10명 이상의 여성을 대상으로 불법촬영을 하고 이를 ‘단톡방’에 유포한 가수 정준영(30)씨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카메라 등 이용 촬영 등)로 입건한 가운데, 불법촬영물 공유가 몇몇 연예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대상화하는 남성들의 보편적인 문화에서 나온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성을 물건처럼 생각하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남성연대를 공고히 하는 문화가 불법촬영물 촬영과 유포의 근본 원인이라는 얘기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1월3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앞에서 죽음에 이른 불법·비동의 촬영물 유포 피해자를 기리며 ‘이름 없는 추모제’를 진행했다. 김효실 기자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한사성)는 1월30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앞에서 죽음에 이른 불법·비동의 촬영물 유포 피해자를 기리며 ‘이름 없는 추모제’를 진행했다. 김효실 기자
실제 <서울방송>(SBS)이 공개한 정씨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보면, 정씨와 동료 연예인 사이에선 불법촬영물 공유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보도를 보면, 이들은 성관계 사실을 여러 차례 자랑했고, 그때마다 다른 대화 참여자들은 영상을 요구했다. 2015년 말 정씨가 친구 김아무개씨와의 대화에서 ‘한 여성과 성관계를 했다’고 자랑하자 한 지인이 ‘동영상은 없느냐’고 묻는다. 이에 정씨는 여성과의 성관계 장면을 몰래 찍은 3초짜리 영상을 올렸다. 정씨는 비슷한 시기에 잠이 든 여성 사진 등을 단체 대화방에 수시로 올리고 자랑하기도 했다. 정씨가 참여한 단체 대화방에는 연예인이 아닌 일반 지인이 찍은 불법촬영물도 올라온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가 참여한 단톡방 대화와 같은 일은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18일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일베)에서는 ‘여친 인증 릴레이’가 벌어져 남성 13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당시 일부 일베 회원들은 여성의 나체, 잠들어 있는 모습, 성관계 장면 등을 찍은 뒤 “여친 인증한다” 등의 제목을 달아 글을 올렸다. 결국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안전과가 수사에 나섰고, 김아무개(25)씨 등 13명을 성폭력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당시 검거된 13명 가운데 20대가 8명으로 가장 많았고, 30대 4명, 40대 1명 순이었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서 “관심을 받기 위해” 혹은 “일베 등급을 올리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가운데 6명은 실제로 자신의 여자친구 사진을 게시한 반면 나머지 7명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사진을 재유포한 것으로 확인됐다.

유랑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는 “불법촬영물 공유는 인터넷 기술에 익숙한 젊은 세대 중심으로 나타날지 몰라도,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공유’라는 점에서 세대 문제가 아닌 남성연대의 문제”라며 “지금껏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고, 이를 통해 남성성을 인정받으려고 한 잘못된 문화 전체를 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준희 기자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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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게되는 날에도 육아는 여성의 몫이 될까요?” : 여성 : 사회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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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여성

“화성에서 살게되는 날에도 육아는 여성의 몫이 될까요?”

등록 :2019-05-12 13:26수정 :2019-05-12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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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SF 단편선집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 출간
육아, 모성, 트랜스젠더, 퀴어, 장애여성 등 폭넓은 주제 담아
“SF는 현실에 대한 탈출이나 혁명의 도구”
“여성주의와 SF 만날 때 SF 장점 끌어올릴 수 있어”
텀블벅 후원 통해 선 출간, 18일 독자들과 북토크 예정
여성주의 에스에프(SF) 소설집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를 펴낸 작가 5명 (왼쪽부터 이진주, 오정연, 디시디시, 이루카, 윤여경)을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여성주의 에스에프(SF) 소설집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를 펴낸 작가 5명 (왼쪽부터 이진주, 오정연, 디시디시, 이루카, 윤여경)을 지난달 19일 오후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사옥에서 만났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혁명을 가능케 하는 건 상상력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이곳’의 변화가 더디고 지난할 때, 잠시 숨 쉴 수 있는 통로를 내어주거나 희망을 놓지 않게 해주는 힘 역시 상상력이다. 현실을 비틀어보는 것을 넘어 다른 차원의 세계를 넘나드는 에스에프(SF)는 바로 이런 상상력을 극대화한 장르다. 여성주의 에스에프(SF)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과 남성의 성 역할이 뒤집힌 세계를 치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역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보여주는데, 2015년 이후 페미니즘이 널리 확산하는 과정에서 재조명을 받으며 국내에서만 20만부가 넘게 팔렸다.

오는 17일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3주기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인 ‘아이다호 데이’(세계보건기구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삭제한 1990년 5월17일을 기념하는 날)를 앞두고, 다른 시공간을 상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여성주의 에스에프(SF) 단편선집이 나왔다. 지난달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720여만원의 후원을 받아 세상에 나온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에디토리얼)다. 김하율, 디시디시(dcdc), 오정연, 윤여경, 이루카, 이산화, 이진주 작가가 각각 집필을 맡았다. <체체파리의 비법>(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지음, 아작) 등 대표적인 에스에프(SF)소설을 번역해 온 이수현 작가는 ‘함께 읽으면 좋을 에스에프(SF) 여성주의 소설’ 추천작을 소개하는 꼭지를 덧붙였다. 지난해 여름, 서울 종로구 삼청동 과학책방 ‘갈다’에서 시작돼 석 달 동안 이어진 여성주의 에스에프(SF)소설 독서 모임 ‘페미 숲 갈다’에서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더 많은 여성서사를 지면에 옮기고 싶다는 데 뜻이 모였다.

사실 에스에프(SF)와 여성주의의 만남은 필연에 가깝다. 이성애 규범과 젠더 이분법 등 성별 고정관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뿌리 깊은 젠더 권력구조를 뒤집어봄으로써 소수자를 조명하는 여성주의도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옥타비아 버틀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어슐러 르 귄 등 내로라하는 에스에프(SF) 작가들이 펴낸 여성주의 작품들이 에스에프(SF)의 계보를 탄탄하게 떠받치고 있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 “에스에프(SF)의 가장 큰 장점이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익숙한 사고 틀에서 벗어나 생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다는 점이라면, 여성주의가 에스에프(SF)와 만났을 때 그 장점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고 이수현 작가는 말한다.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700여만원이 넘는 후원을 받았다. 오는 18일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북토크 행사를 연다.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는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700여만원이 넘는 후원을 받았다. 오는 18일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북토크 행사를 연다.

<우리가 먼저 가볼게요>(이하 ‘우먼볼’)가 보여주는 세계도 우주만큼이나 광활하다. 만약 감정을 호르몬제로 만들어 투여할 수 있게 된다면 ‘모성 호르몬’은 어떤 요소로 구성될까? 인류가 화성으로 이주할 수 있게 된 날에도 육아는 계속 여성의 몫으로 남을까? 트랜스젠더 여성과 게이, 시스젠더(신체적 성별과 자신의 성별 정체성이 같다고 느끼는 사람) 여성이 연대해 ‘아이언맨’과 같은 트랜스휴먼(과학기술을 이용해 신체 기능을 변화시킨 종)과 싸우는 건 어떤 모습일까? 브이아르(VR·가상현실) 기술 등을 이용해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면, 그 기술은 장애 여성의 성과 사랑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인간이 지니고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어떤 양상을 띨까?

7편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물음이 간단치만은 않은 건, 지금 이곳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젠더 이슈를 또 다른 세계를 기반으로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트랜스젠더와 퀴어, 장애여성의 목소리를 타자화하지 않고 담아낸다. 젠더 갈등, 육아와 경력단절, 다크웹(아이피 주소 추적이 어려운 인터넷 공간)을 넘나드는 디지털 성범죄도 함께 다룬다.

왜 이런 기획을 시작했을까. 최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본사에서 만난 작가들에게 물었다. 이들은 에스에프(SF)가 여성주의와 만남으로써 “현실의 권력을 해체해서 재구성할 수 있”(윤여경)고, 현실에 대한 “탈출이나 혁명의 도구”(이진주)가 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과학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약자를 조명하고, 후미진 곳을 드러내며,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리게 만드는 힘이 에스에프(SF)에 있다는 거다. 남성 작가로 참여해 “여성들의 고민과 목소리를 빼앗아오는 건 아닐까” 거듭 조심스러웠다고 밝힌 작가 디시디시(dcdc)는 “화성인, 인공지능,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는 상황을 (SF를 통해) 즐기면서도 정작 여성의 인권이 나아진 사회를 상상하지 못한다면 염치없는 일 아닐까요?”라고 되물었다.

에스에프(SF)와 여성주의를 잇는 또 다른 작당은 벌써 시작됐다. 이루카 작가는 “지금 (페미니즘을 통해) 연대하고 공감하는 여성들이 할머니가 돼서도 같이 게임을 즐기며 사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며 “정상가족의 프레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교감하고 연대하며 받는 위로와 공감을 담고 싶다”고 했다.

오정연 작가는 “다른 행성으로 모험을 떠나는 소녀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딸을 키우는 그는 “여자아이들이 볼만한 모험 서사가 정말 없다”며 “소녀가 모험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계속 쓰고 싶다”고 했다. 디시디시 작가 역시 ‘캡틴 마블’과 같은 슈퍼히어로인 한국 여성의 이야기를 집필 중이다.

<우먼볼> 작가들은 오는 18일 서울 마포구 ‘프리스타일 스페이스’에서 후원자를 대상으로 북토크 행사를 연다. 일반 독자들은 이르면 14일부터 온라인서점 ‘예스24’에서 <우먼볼>을 만나볼 수 있다.

박다해 기자 doal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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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제크 칼럼] 가슴에서 성기까지, 이참에 아예 배설까지도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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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칼럼칼럼

[슬라보이 지제크 칼럼] 가슴에서 성기까지, 이참에 아예 배설까지도

등록 :2019-03-14 18:00수정 :2019-03-16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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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이 지제크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이 글의 다소 품위 없는 제목은 최근 ‘여성 억압’과의 싸움과 관련된 어떤 미심쩍은 경향을 표현하고 있다. 먼저 여성의 가슴에 대한 물신화를 끝내고 유방을 여성 신체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여성도 가슴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이들은 상의를 탈의하고 도심 시위행진을 벌이곤 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여성의 가슴에 대한 성애화를 멈추자는 것이다. 그다음에는, 궁극적인 성적 대상화의 부위인 여성의 성기를 탈신비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미 여성의 유방 사진과 남성의 성기 사진을 담은 사진집 두 권을 출간한 바 있는 사진가 로라 도즈워스는 최근 여성 100명의 성기 사진을 담은 사진집 <여성성>을 출간했다. <가디언>은 도즈워스의 신간 사진집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도즈워스의 목표는 여성들이 자신의 성기에 대해 느끼는 수치심을 극복하도록 돕는 것이다. 도즈워스는 새 사진집에서 여성과 젠더 비순응자 100명의 성기 사진을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사진집 <여성성>은 도즈워스의 세번째 프로젝트다. 도즈워스는 첫번째 사진집 <벌거벗은 진실>에서 여성의 유방을, 두번째 사진집 <남성성>에서 남성의 성기를 소개한 바 있다. 도즈워스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여성의 성기를 성적 행위와만 관련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나눈 이야기 중에는 ‘섹시’하지 않은 것도 무척 많았어요. 월경, 완경, 불임, 유산, 낙태, 임신, 출산, 암 같은 이야기 말이죠.’ 도즈워스는 자신이 여성들이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도록 하는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위 기사도 지적하고 있지만, 지금 “여성의 성기는 새로운 문화적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이를테면, 기자 린 엔라이트는 <질: 여성의 몸 다시 배우기>를 며칠 전 출간했다. 스웨덴 예술가 리브 스트룀퀴스트는 베스트셀러 <이브 프로젝트: 페미니스트를 위한 여성 성기의 역사>에서 여성의 성기와 월경을 다룬다. 영국 뮤지컬 <벌버린>은 여성의 성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자신의 몸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그림 수업에서 “여성의 성기를 살펴보는 워크숍”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몸을 되찾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여성들이 월경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캠페인까지 등장했다. 그렇다면 아예 끝까지 가서 배설 행위를 탈신비화하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배설 행위를 살펴보는 워크숍’ 같은 행사를 여는 것은 어떨까? 루이스 부뉴엘의 영화 <자유의 환영>을 본 사람이라면 식사와 배설이 뒤바뀐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테이블을 중심으로 변기에 앉아 함께 배설을 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중 시장기를 느낀 남자가 일어나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집 하녀에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어디냐고 묻는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제로 해보면 어떨까?

오해의 여지를 피하기 위해 먼저 말해두겠다. 여성의 성기를 탈신비화하려는 시도들은 정당하고 또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여성 성기가 남성 욕망의 신비화된 궁극적 대상으로 물신화되고, 여성 억압적인 체제에 의해 왜곡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슨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일까? 다시 부뉴엘로 돌아가 보자. 부뉴엘은 ‘평범하고 단순한 욕망이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실현불가능하게 되는 상황’을 모티브로 영화를 여러 편 찍었다. <황금시대>에서는 남녀 한쌍이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그때마다 엉뚱한 일들이 생겨 그들의 바람은 계속 좌절된다. <범죄에 대한 수필>에서는 주인공이 살인을 하려 하지만, 그의 시도는 계속 실패한다. <절멸의 천사>에서는 상류 사회 사람들이 만찬을 마치고 저택을 떠나려 하지만 번번이 문밖을 나가지 못한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서는 주인공들이 만찬을 함께 하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사건들로 계속 식사를 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는 늙은 남자가 자신의 젊은 연인과 관계를 맺으려 하지만 여자가 수를 쓰는 바람에 그들의 성관계는 끊임없이 유예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위가 ‘사물’의 위치를 차지하면서 욕망의 숭고한 대상을 체화하기 시작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었던 행위가 실현불가능한 행위가 된다는 점이다. 인물들이 하려는 행위는 저택의 문밖으로 나가는 것이나 지인들과 만찬을 함께 하는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일들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평범한 행위가 성스럽고 금지된 타자의 공백을 차지하자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장애물들이 생겨나면서, 원래 하려던 행위는 절대 도달하거나 성취할 수 없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라캉이 승화라는 개념을 어떻게 보았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캉은 승화를 “대상을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 즉 끊어지기 쉬운 단락 회로 속에서 대상을 불가능한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파트너와 성적으로 강렬한 상호작용을 나눌 때, 적절하지 않은 말이나 몸짓 하나만으로도 쉽게 성적 긴장감을 잃고 승화 상태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 한 남자가 성적 열망에 사로잡혀 사랑하는 여자의 성기를 들여다보면서 곧 경험할 쾌락을 기대하고 있다고 치자. 그러다 어떤 일이 생겨 분위기가 깨진다. 이제 성적 열망에서 깬 남자가 느끼는 것은 오줌과 땀 냄새밖에 없다. 이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라캉 식으로 보자면, 이 장면에서는 승화와 정확히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말해, 여성의 성기는 “위엄을 갖춘 사물의 수준”에서 떨어져 일상적 현실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승화와 성애화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애에서,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숭고함과 우스꽝스러움은 얼핏 전혀 다른 개념처럼 보일지 모른다. 성행위가 사람 간에 일어나는 가장 친밀한 행위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행위에 참가하는 주체들이 절대로 외부적 관찰자의 태도를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볼 때는 성행위가 적어도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런 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그 행위는 매우 강렬한 반면, 일상적 삶은 무심하고 침착하기 때문이다.

그럼 오늘날 여성의 성기를 탈신비화하려는 시도들을 다시 생각해보자. 이런 시도들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이까지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은 여성의 성기가 남성 욕망의 물신으로 대상화된다고 비판하려다, 성애를 가능하게 하는 승화의 기본 구조까지 침식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인간의 성적 긴장이 모두 사라진 평범하고 단조로운 세상이다. 그들은 ‘탈물신화’된 신체기관을 전시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평범해진 신체기관에 불과할 것이다.

승화에서, 사물의 수준으로 승격될 수 있는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고 임의적이어서 어떤 평범한 대상도 불가능한 사물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다. 승화의 이런 특성을 안다면, 성적 승화를 가부장적 신비화에서 쉽게 해방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오늘날 만들어지고 있는 성애의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가 얻게 될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두 거장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말하는 ‘억압적 탈승화’다. 성애의 새로운 공간에서 우리의 성적 기관은 탈승화된다. 그 결과 우리는 새로운 자유가 아니라 성이 완전히 억압되는 음울한 현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번역 김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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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세상에 씨앗을 뿌린 농사 여신, 자청비를 아시나요

기자
권도영 사진 권도영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옛이야기(41)

'규화보전'의 절대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래 성이었던 남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어가는 내용을 담은 영화 <동방불패>. [중앙포토]

'규화보전'의 절대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래 성이었던 남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어가는 내용을 담은 영화 <동방불패>. [중앙포토]

 
영화〈동방불패〉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일월신교의 최고 교주. ‘규화보전’의 절대 무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래 성이었던 남성을 버리고 여성이 되어간 인물. 동방불패는 본래 〈소오강호〉라는 김용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였는데, 이러한 인물형에는 개인의 전인격적 완성에 성 정체성 확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던 작가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규화보전’의 절대 무공은 ‘여성 되기’보다 ‘남성 버리기’에 초점이 있는 듯하다. 절대 무공을 위해 거세해야 하는 남성이란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확고한 권위와 아집을 뜻하진 않을까. 그것마저 내려놓아야 절대 무공을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동방불패처럼 완전히 성별 구분을 없앤 건 아니지만,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 데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는 우리 신화의 인물로 ‘자청비’가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남장을 한 채 활약하는 데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었던 〈뮬란〉과도 비교될 수 있지만, 결국 아버지의 딸로 돌아가는 뮬란에 비해서는 자청비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한 줄거리를 소개한다.
 
자청비는 어느 날 냇가에서 우연히 만난 하늘 옥황 문선왕의 아들, 문곡성 문도령과 함께 거무선생에게 글을 배우게 되었다. 자청비는 남장을 한 채 문도령과 한 방에서 지냈는데, 삼 년쯤 되었을 때 문도령은 배필이 마련되었으니 그만 돌아오라는 옥황의 전갈을 받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사진 제주특별자치도청 홈페이지]

[사진 제주특별자치도청 홈페이지]

 
자청비도 따라나서, 삼 년 묵은 때나 씻고 가자며 개울에서 함께 목욕하기를 청한 뒤 비로소 여성인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을 확인했으나 문도령은 정표로 박씨를 남긴 채 하늘로 돌아가야 했다.
 
자청비의 집에는 정수남이라는 동갑내기 하인이 있었는데 게으르고 탐욕스러웠다. 자청비는 정수남이 자신에게 흑심을 드러내 이놈을 혼내려 죽여버렸다가 환생꽃으로 다시 살려냈다.
 
그러나 자청비의 부모는 이 일로 몹시 화를 내며 자청비를 집에서 쫓아냈다. 하염없이 헤매다 주모할미네에 거처를 정하게 되었는데, 주모할미는 문도령의 혼인식 때 쓸 비단을 짜고 있었다. 자청비가 비단에 자기 이름을 수놓아 보내면서 문도령이 자청비가 있는 곳을 알게 되어 둘은 재회하였다.
 
문도령의 부모는 아무나 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며 백탄과 숯불 위에 칼 선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건너오는 이를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문도령의 정혼자는 실패하고 자청비가 성공하여 자청비가 드디어 문도령의 배필이 되었는데, 이때 자청비가 발뒤꿈치를 살짝 베어 피가 나는 바람에 이를 치맛자락으로 쓸어 두니 이것이 월경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자청비는 거무선생의 삼천 제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고, 소 아홉 마리를 함부로 먹어버린 정수남의 죄를 벌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았고, 정수남의 혼이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해괴한 짓을 하자 그걸 찾아내어 혼을 내준 뒤 환생꽃으로 본디 모습을 찾게 하였다.
 
이런 능력이라면 세상을 구하고도 남을 것이나, 부모에게 자식의 너무 심하게 뛰어난 능력, 게다가 겁도 없이 그걸 마구 휘두르는 태도는 집 밖으로 내쫓아 벌을 주어야 할 무서운 것이 되고야 말았다. 하물며 여자아이가 함부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자청비는 어찌 보면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하늘의 시험도 통과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이로써 여성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인 월경이 시작되었다는 상징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자청비가 마음껏 자기 능력을 펼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이가 바로 문도령이었으니, 사랑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자청비가 문도령 때문에 고생하게 되는 내력은 인간 세상에 전쟁이 일어난 연유로 시작된다. 자청비 이야기의 뒷부분을 좀 더 들여다본다.
 
인간 세상에 큰 전쟁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지자 하늘나라에 원조를 청하였다. 하늘나라에서는 문도령을 시기하던 이들이 있어, 이들이 문도령을 도원수로 삼아 전쟁터에 내보내려 하였다. 문도령이 이 때문에 걱정하자 자청비는 문도령을 대신하여 도원수로 나섰다. 그리고 문도령에게는 자신이 남장하고 다니던 시절 인연을 맺었던 사라장자의 딸에게 잠시 가 있다가 모월 모일에 돌아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자청비가 난을 평정하고 하늘나라로 돌아온 뒤 약속한 날이 지나도록 문도령은 사라장자의 딸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느라 돌아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자청비는 화가 나서 옥황상제에게 청하여 하늘 옥황의 갖은 곡식 종자를 얻어서는 하늘을 떠나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부모님을 만나 인사한 후 정수남을 데리고 세상 농사를 돌보러 나가, 밭도 갈아주고 하늘 곡식 종자를 나누어주어 풍년이 들게 하니, 이로써 자청비는 중세경, 정수남은 하세경이 되었다.
 
그리고 자청비의 남편 문도령이 상세경이 되어 이들이 인간 세상의 농사일을 관장하는 신이 되었다. 자청비가 하늘에서 갖은 곡식 종자를 받아올 때 메밀 씨를 깜빡 잊고 안 가져와 뒤에 다시 올라가 받아 오니, 이것이 지금껏 메밀이 다른 곡식보다 늦게 되는 연유이다.
 
<세경본풀이>의 주인공, 자청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의 욕망과 힘으로 움직였다. [사진 제주특별자치도청 홈페이지]

<세경본풀이>의 주인공, 자청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의 욕망과 힘으로 움직였다. [사진 제주특별자치도청 홈페이지]

 
이 이야기는 〈세경본풀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지는 무속신화이다. 우리 무속신화는 이렇게 누군가 신이 된 내력, 인간 세상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내력을 풀이한다. 이 이야기에서 자청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의 욕망과 힘으로 움직였다.
 
문도령에게 실망하였을 때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씨앗을 가지고 내려와 농사를 관장하는데, 남성과 맺은 인연을 이어가는 데 연연하기보다 자신만의 일,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섰다. 이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는 그 자유를 실현할 능력과 기백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매우 매력적이고, 꼭 기억하고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여성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청비야 그렇다 치고, 그렇게 속 썩이고 아무런 역할도 못 했던 문도령이 상세경, 농경을 다스리는 신 중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신이 되었다는 결말은 선뜻 납득하기 힘들었는데, 문도령은 하늘 옥황 문선왕의 아들로서 하늘 그 자체를 상징한다는 신화적 해석이 제시된 바 있다. 이 길고도 복잡한 신화 서사를 하늘(문도령)-인간 세상(자청비)-땅(정수남)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자청비(自請妃)라는, 스스로 여인이 되기를 청하였다는 이름의 이 인물은 남성성, 여성성의 틀을 거부하고 자신의 욕망과 목표에 충실한 새로운 여성상, 혹은 건강한 여성상을 제시하는 인물로 으뜸이다. 성 역할에 대한 경계가 전혀 없고, 마음에 들면 노력하여 취하였고, 마음에 들지 않게 되면 가차 없이 떠날 줄을 알았다.
 
그렇게 떠날 때 그저 대책 없이 도망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헤아리고 다음 할 일을 도모했다. 하늘 옥황에게서 씨앗을 받아와 인간 세상에 전파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애초에 자청비가 보였던, 정수남을 죽이고 살리고 할 줄 알았던 능력에서부터 이미 예비되어 있었다.
 
생명을 관장한다는 것만큼 이 세상에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거기에 하늘은 가끔 심술을 부리기도 하고 인간 세상이 어떠하든지 제멋대로 볕도 주었다가 비바람도 주었다가 하는 것이다. 거기에 휘둘려서야 인간이 살 수 있겠는가. 자청비가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문도령을 가차 없이 떠나 인간 세상에 종자를 나누어주고 농사일을 돌봐주었다는 것에는 그러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모성으로만 규정할 수 없는 자청비의 생산성, 여성의 힘

자청비가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된 것은 '출산과 육아' 같은 생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은 아니다.[사진 pixabay]

자청비가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된 것은 '출산과 육아' 같은 생산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은 아니다.[사진 pixabay]

 
흔히들 여성성을 이야기할 때 모성 혹은 모성애를 중심에 두곤 한다. 그러면서 또한 대지의 여신, 대모신(大母神)을 떠올리곤 한다. 이때 대지를 여신에 등치 시키는 방식은 ‘생산’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에만 복무하는 기능적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자청비는 아이를 낳아 본 적이 없다. 출산과 육아를 경험했기 때문에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 된 것이 아니다.
 
자청비의 생산력, 혹은 생산성이란, 태어나게 하고 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죽이기도 하는 데에서 발휘된다. 즉 남성성에 대치되는 여성성으로서가 아니라, 그 구분 자체를 넘나드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신직神職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본래 양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이 양쪽으로 분리하고 나서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 헤매고 다닌다고 했다. 지금 세상의 갈등은 분리된 양쪽이 화합하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어느 한쪽에 지나치게 무게중심이 쏠려 있었기에 발생하고 강화되어 온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 편향을 제거해 버린다고 하여 해결될 수 있을까. 어차피 우리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개개인의 개체로서 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내 안의 남성성, 내 안의 여성성을 모두 인지 및 인정하고 그것의 조화를 추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이 사회의 남성과 여성을 함께 평등한 개체로 인정하고 그 둘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태도가 변화되어야 할 것이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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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의 '그래미의 난' 덕에···콧대높던 그래미가 방탄 인정"

아미 연구하는 아미 출신 이지행 박사

이지행씨는 ’아시안, 보이밴드, 비영어권 아티스트 등 거의 모든 마이너리티적 성격을 갖춘 방탄이 팬들의 열광적인 풀뿌리 지지로 메인스트림에 올라선 사건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공을 넘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종택 기자

이지행씨는 ’아시안, 보이밴드, 비영어권 아티스트 등 거의 모든 마이너리티적 성격을 갖춘 방탄이 팬들의 열광적인 풀뿌리 지지로 메인스트림에 올라선 사건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성공을 넘는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종택 기자

세계 최고의 보이밴드 아니 ‘제2의 비틀즈’가 되었다. 이들의 끝은 어디일까.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방탄소년단이 ‘기적’을 이뤘다는 것, 그 기적 뒤에는 글로벌 팬클럽 ‘아미(A.R.M.Y·Adorable Representative MC for Youth)’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미는 방탄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존재다. “빌보드에 서고 싶다”고 하니 그렇게 해줬다. 방탄도 시상식마다 “아미 덕분이다. 아미 사랑해”를 외친다.
 

[양성희의 직격인터뷰]
방탄 성공의 주역인 팬클럽 아미
중장년, 다양한 인종, 소수자 포함
목표 정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여
음악의 메시지를 팬덤의 정신으로

그저 비정상적 열정에 사로잡혀 울부짖는 소녀팬들이 떠오르는가. 책 『BTS와 아미 컬처』를 펴낸 문화연구자 이지행(45)씨는 “방탄은 10대 소녀 중심의 아이돌 팬덤을 인구통계학적으로 다양하게 진화시켰다”고 말한다. 2017년 미국 50개 주 아미연합(BTSX50States)이 지역 라디오 DJ들을 공략해, 보수적인 라디오에서 방탄 노래가 흘러나오게 한 일화도 들려줬다. 오직 ‘내가 좋아하고, 나를 감동시킨 방탄이 미국에서 제대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는 열망의 결과였다. 팬들이 애호가·소비자를 넘어 서포터·프로모터가 됐다.
 
그 자신이 아미인 ‘팬-연구자’ 이씨는 “방탄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데는 아미 팬덤이라는 유례없는 현상이 있었다”며 “방탄 현상의 핵심이 곧 아미”라고 강조했다 “서태지도 안 좋아했다”는 그는 2017년 ‘아메리칸뮤직어워드(AMA)’ 무대에 선 방탄을 처음 보고 뒤늦게 ‘입덕’했다. 국내외 아미 중에는 자신처럼 “아이돌에 관심 없던 30~40대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고 전했다.
 
이지행씨의 책 『BTS와 아미 컬처』. 이씨는 미국 칼아츠 예술학 석사를 거쳐 중앙대에서 영화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 출강하고 있다.

이지행씨의 책 『BTS와 아미 컬처』. 이씨는 미국 칼아츠 예술학 석사를 거쳐 중앙대에서 영화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중앙대에 출강하고 있다.

아미의 규모는?
“공식 팬클럽 인원이 150만명 정도인데 외국 아미들은 국내 시스템이 불편하니까 잘 안 온다. 트위터 팔로워 수는 2000만이 넘는데, 빌보드 같은 시상식 투표 때 팬들이 여러 계정을 만들기 때문에 다소 허수다. 대략 1000만명, 그중 한국과 미국에 각각 200~300만명으로 추산된다. 해외 팬덤이 국내보다 크다. 트위터나 외국 팬들이 모인 ‘레딧(reddit)’ ‘아미노 앱(Amino App)’ 같은 커뮤니티를 연구했다. 방탄은 2013년 데뷔 이전부터 방탄로그(log)나 유튜브 등 여러 채널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음악을 들려줬다. 해외 팬덤이 처음 확인된 건 2014년 미국에서 열린 K-con이었다. 가장 신인급인데 가장 환호가 컸다. 글로벌 아미는 2018년 서구 메인스트림 시장에서의 방탄의 성공을 위해 ‘2018 Race For Gold’라는 목표를 정하고 나라별 팬덤이 해야 할 일을 전달하기도 했다. 연초 세운 7개의 미션을 모두 수행해 2018년 미국 차트에 유의미한 변화(빌보드 앨범차트 3연속 1위)가 생겼고, 2019년에는 폐쇄적인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차트까지 움직였다.”
 
한국형 팬문화의 수출로도 일컬어진다.
“보통 K팝 팬들이 ‘겸덕(여러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인데 반해 아미들은 방탄만 좋아한다. 방탄을 K팝 일반과 구분하는 것이다. 물론 집단적인 응원 구호, 광고판 계약해서 서포트하는 것, 시상식을 위한 투표, 강한 로열티 등은 K팝 팬덤과 같다. 음원 순위를 높이기 위한 반복적 스트리밍은 종종 문제로 지적되는데, 사실 이제는 그걸 문제 삼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빌보드 차트 등이 팬덤 위주로 굴러가고 있다. 아리아나 그란데, 비욘세, 원 디렉션, 숀 멘데스 등 서구 아티스트 팬덤도 굉장히 조직적으로 스트리밍한다.”
 
아미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10대 소녀 중심 아이돌 팬덤을 넘어 인구 구성이 무척 다양하다. 남성도 있고, 30~40대 중장년 여성, 아시안·라틴·흑인 등 다양한 인종, 성소수자, 지식인팬 등 다양하다. 백인 팬 중에는 방탄을 좋아하면서 비로소 세상의 부조리를 몸으로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많다. 아시아 보이밴드인 방탄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끼면서 말이다. 방탄으로 인해 다양성, 마이너리티에 대한 존중을 진심으로 고민하게 됐다고도 한다.” 
 
마이너리티의 상징이 됐다는 얘기다.
“방탄이 대변하는 게 마이너리티성, 혹은 언더독(underdog)성이다. 신자유주의는 세계 인구의 99%를 스스로 언더독이라고 여기게 하는 측면이 있지 않나. 방탄은 언더독 중에서도 언더독으로 출발했다. K팝 중에서도 굉장히 낮은 곳에서 출발했고. 그런 언더독의 한계를 극복해간 과정에 대한 응원이 크다. 2018년 초 그래미상을 주관하는 레코딩아카데미 트위터에서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앨범’을 물었는데, 누군가 BTS를 썼다가 ‘진짜 음악을 말하라’는 조롱이 쏟아졌다. 그때 전 세계 아미들이 달려들어서 방탄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수만개의 댓글을 달았다. ‘우울증이었는데 자살 생각을 하지 않게 도와줬다’ ‘목을 매기 직전 BTS를 보면서 울었다’ 이런 글이 많았다. 밑바닥에서 올라온 방탄의 성장사, ‘지금 자체로도 괜찮다’는 음악의 메시지에 공감하면서 위로받았다는 것이다. ‘미국이 더는 인종차별 말고 방탄을 인정하는 게 다양성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글도 많았다. 이 ‘그래미의 난’ 이후 콧대 높은 그래미가 방탄을 받아들이게 된다.”
 
팬들이 프로모터 역할을 했다.
“팬들이 신곡 나오면 24시간 동안 잠을 안 자고 유튜브를 본다. 2018년 ‘아이돌’ 때 24시간 동안 4500만 뷰가 나오니까 CNN이 보도했기 때문이다. 아미가 기록을 만들어주면 예전에는 상대도 안 해주던 어디를 뚫을 수 있는지 팬들이 확인한 거다. 2017년 빌보드 톱 소셜 아티스트 투표에서 방탄이 저스틴 비버랑 붙어서 무려 3억표를 얻은 것도 이런 동력 때문이다.”
 
아미 팬덤의 구조는.
“모든 팬과 소통하는 회사(빅히트) 스태프인 팬 매니저는 있지만, 팬 대표인 회장은 없다. 물론 투표라든지 팬 이벤트 등 행사를 할 때 이를 이끄는 조직은 있는데, ‘독려계’라는 자발적 트위터 계정들이다. 이것도 전달자 역할만 하지 대표성은 인정받지 못한다. 익명의 온라인 팬덤에서 민주주의를 펼치려는 결벽성이 크다고 할까. 서구 아티스트 팬덤은 앨범 발매일, 판매량 등을 알려주는 정보형 계정이 대부분인데 아미 팬덤은 ‘독려계’ 외에도 없는 게 없다. 북클럽계정, 전 세계 심리상담사· 심리학도 아미가 모인 심리상담계정, 아미들 간의 문화적 차이와 다양성을 설명해주는 컬처계정. 상시로 자선을 하는 계정까지. ‘번역계’라고 불리는 팬번역가 계정도 있다. 교포·유학생 20여명이 무보수로 운영하는데 가사·인터뷰, 방탄이 생산하는 모든 콘텐트를 거의 실시간 번역한다. 문화적 맥락을 각주로 달기도 한다.”
 
K팝 팬덤과의 차이는 뭘까.
“누군가를 좋아하고 그게 자기 삶에 활력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 팬덤의 특징이라면 K팝 팬덤은 열광적인 지지와 서포트를 하는 행위적 특성을 지닌다. 아미 팬덤은 더 나아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돼서 그로부터 받은 선한 영향력을 타인과 세상에 적극적으로 쓰려 한다는 데 있다. 이처럼 팬덤의 인구구성이 다양해지는 게 방탄의 음악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방탄과 아미가 영향을 주고받으며 상호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식이다.”
 
팬덤이 커지면서 생기는 문제는 없나.  
“종종 한국 아미와 해외 아미 사이의 문화적 충돌이 있다. 활동 축이 해외가 되면서 오는 한국 팬덤의 소외감도 있고. 하지만 방탄이 서구 미디어에게 인종차별을 받거나 논란에 휘말릴 때 출동하는 것도 아미다. K팝을 ‘게이팝’이라 부르기도 하듯 남자가 화장하니 게이라는 공격도 많이 받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방탄의 남성성이 오히려 서구 지식인들을 팬덤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화장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 불안함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통념을 깨는 대안적 남성성이라고 보더라.”
 
아미 팬덤의 진짜 힘은 뭘까.
“사실 방탄 팬덤 내부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일어난다. 단 자정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 내가 힘들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할 때 방탄을 만났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팬이 되어야 한다는 팬덤 멘탈리티 때문이다. 방탄이 아미라는 새로운 수용자 집단을 만들었고, 그런 아미가 방탄을 성숙하게 만들고 있다. 방탄 현상의 본질이 아미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양성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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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영국사회 BTS에 깜짝 놀라…‘대안적 남성상’ 될 것”

지난 6월 1일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하고 있는 방탄소년단. [사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지난 6월 1일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공연하고 있는 방탄소년단. [사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공부하는 ‘덕후’들이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26~28일 서울 삼성동 슈피겐홀에서 열리는 ‘BTS 인사이트 포럼’은 그 해답을 엿볼 수 있는 자리다. 사흘간 무대에 오르는 연사 30여명의 면면도 다양하다. 이탈리아에서 온 20대 유튜버 안젤라부터 70대인 진영선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명예교수까지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하는 ‘아미’라는 것을 제외하면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독특한 조합이다. 다루는 분야 역시 인문학ㆍ미디어ㆍ마케팅ㆍ디자인 등 광범위하게 퍼져 나간다. 
 

영국 킹스턴대 콜레트 발메인 교수
‘BTS 인사이트 포럼’ 연사로 첫 방한
“인문학·마케팅 등 다각도 연구 흥미”
내년 1월 런던서 ‘BTS 콘퍼런스’ 준비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국 킹스턴대 영화·미디어학부의 콜레트 발메인(57) 교수. 2008년 『일본 호러 영화 입문서』를 시작으로 『월드 시네마 디렉터리: 한국 편』(2013), 『한국 스크린 컬처』(2016) 등 저서 4권과 공저 6권 등을 쓴 한국영화 전문가이자 내년 1월 4~5일 영국에서 열리는 ‘BTS 콘퍼런스’를 준비 중인 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10년 넘게 한국 대중문화를 연구했는데 이제야 처음 와보게 됐다”며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부터 BTS 면세점 광고가 맞아줘서 반가웠다. 영화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거리도 친근한 느낌”이라며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 타파

영국 킹스턴대 콜레트 발메인 교수. 26~28일 서울에서 열리는 ‘BTS 인사이트 포럼’에 연사로 참석한다. 내년 1월 런던에서 BTS 콘퍼런스를 준비 중이다. 우상조 기자

영국 킹스턴대 콜레트 발메인 교수. 26~28일 서울에서 열리는 ‘BTS 인사이트 포럼’에 연사로 참석한다. 내년 1월 런던에서 BTS 콘퍼런스를 준비 중이다. 우상조 기자

포럼엔 어떻게 참가하게 됐나.  
“지난 6월 영국 웸블리 공연에서 『BTS 예술혁명』의 저자 이지영씨 소개로 기획자 김영미씨를 만났다.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통해 BTS 현상을 분석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내년 1월 런던서 열리는 콘퍼런스에도 이들을 비롯한 다양한 학자를 초청하기 위해 논문을 수집 중이다. 좀 더 학술적인 행사가 되겠지만, BTS가 지역과 언어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젠더 문제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고.  
“BTS의 남성성은 K팝 내에서도 매우 독특하게 발현되고 있다. ‘마초적 남성성’이 아닌 ‘사내아이 감수성’에 가깝다. 그들은 모두 2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소년기에 머무르는 콘셉트를 종종 차용한다. 앞서 서양에서 주목받은 한국 가수 비, 싸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이 지니는 의미는.  
“‘대안적 남성성’을 통해 긍정적 롤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 문화권에 따라 전통적 성 역할을 강요받기 마련인데 정답이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남자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선입견을 깨는 것이다. ‘미투 운동’ 이후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대안으로서도 시의적절하다.”
 

“‘게이팝’ 비난은 문화적 오해서 비롯”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앞두고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전광판 앞에 모인 팬들의 모습. [사진 트위터]

방탄소년단 콘서트를 앞두고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전광판 앞에 모인 팬들의 모습. [사진 트위터]

발메인은 “영국은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보수적인 사회”라고 밝혔다. 서양이 동양보다 개방적일 것이라는 통념과 달리 전통적 가치에 반하는 것에 대한 차별의 벽이 공고하단 얘기다. “유치원 때부터 성소수자(LGBT)에 대해서 가르치지만 실제 그들의 삶은 녹록지 않다. 인종ㆍ계급 등 모든 소수자가 마찬가지”라며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BTS의 ‘자신을 사랑하라(Love Yourself)’는 메시지는 소구력이 클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일부에서는 예쁘장한 외모와 옷차림으로 무장한 K팝 보이그룹을 ‘게이팝’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멤버들 사이의 거리낌 없는 스킨십도 공격 대상이 됐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겨나는 오해”이자 “대중문화에서 더 많은 롤모델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음악은 항상 앞장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역할을 해 왔잖아요.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젊은 청중들과 만나 소통하다 보니 더 자유롭고 유연하죠.”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매력을 해외에 전파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사진 CJ엔터테인먼트]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매력을 해외에 전파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그의 관심사가 영화에서 음악으로 옮겨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리니치대에서 이탈리아 호러 영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링’(1998) ‘오디션’(1999) 등을 접하며 일본 호러 영화에 매료됐고,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2003) 등을 보며 한국식 스릴러에 빠져들었다. 2016년 10월 미디어 기호학 수업을 위해 유튜브에서 자료를 찾던 중 ‘보이 미츠 이블(Boy Meets Evil)’ ‘피 땀 눈물’ 등 뮤직비디오를 보고 BTS에 ‘입덕’했다.  
 

“장르 간 경계 허물어져 한류 더 확대될 것”

“미디어 속에 등장하는 텍스트를 해석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뮤직비디오는 훌륭한 학습 자료예요. 5분 안팎의 분량으로 짧지만 많은 것들이 내포돼 있으니까요. 문학적으로는『데미안』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초능력이나 호러 영화의 영상 문법도 혼용돼 있습니다. 한국 콘텐트에는 서브 텍스트가 많이 깔려 있기 때문에 표면만 봐서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제 경우엔 일본 문화에 대한 선행 연구가 큰 도움이 됐죠.”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드라마 ‘킹덤’. 한국형 좀비물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제작된 드라마 ‘킹덤’. 한국형 좀비물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사진 넷플릭스]

그는 “장르 간 경계가 허무는 크로스오버가 한류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6년 런던 한국영화제가 처음 시작됐을 때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이렇게 빨리 커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일본은 애니메이션ㆍ게임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이 확산돼 가고 있었지만 한국은 영화밖에 없었거든요. 2011년 샤이니가 런던한국영화제에서 공연 할 때 몰려든 관중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영화 팬층과는 전혀 달랐으니까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늘어나고, 영화와 드라마 간 협업이 활발해지면서 한류 소비층의 외연도 확장됐다는 분석이다. “이제 기존 한국 영화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넷플릭스의 ‘킹덤’을 보고, 한국 음악을 들어본 적 없던 사람들도 BTS를 이야기해요.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고.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배울 필요성이 없었는데 원어로 콘텐트를 즐기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지금의 현상이 어떻게 발전돼 나갈지 한국 문화의 오랜 팬이자 학자로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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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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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 출신 영국 학자 “방탄소년단, 전통적 성 역할 깨는 대안적 남성상”

콜레트 발메인

콜레트 발메인

공부하는 ‘덕후’들이 모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26~28일 서울 삼성동 슈피겐홀에서 열리는 ‘BTS 인사이트 포럼’은 그 답을 엿볼 수 있는 자리다. 사흘간 무대에 오르는 연사 30여명의 면면도 다양하다. 이탈리아에서 온 20대 유튜버 안젤라부터 70대인 진영선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명예교수까지 방탄소년단(BTS)을 좋아하는 ‘아미’라는 것을 제외하면 공통분모가 없는 독특한 조합이다. 다루는 분야 역시 인문학·미디어·마케팅·디자인 등 광범위하다.
 

킹스턴 대학 콜레트 발메인 교수
‘BTS 인사이트 포럼’ 강연차 방한
내년 1월 영국서 콘퍼런스 주최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연사는 영국 킹스턴대 영화·미디어학부의 콜레트 발메인(57) 교수. 2008년 『일본 호러 영화 입문서』를 시작으로  『월드 시네마 디렉터리: 한국 편』(2013),  『한국 스크린 컬처』(2016) 등을 쓴 한국영화 전문가이자 내년 1월 4~5일 영국에서 열리는 ‘BTS 콘퍼런스’를 준비 중인 학자다.
 
“10년 넘게 한국 대중문화를 연구했는데 이제야 처음 와보게 됐다”는 그는 BTS를 젠더 문제의 관점에서 주목했다. “BTS의 남성성은 K팝 내에서도 매우 독특하게 발현되고 있다. ‘마초적 남성성’이 아닌 ‘사내아이 감수성’에 가깝다”며 “이는 ‘대안적 남성성’을 통해 긍정적 롤모델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지난 5월31일 영국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전광판에서 상영된 방탄소년단의 팬 메시지 영상. [사진 트위터]

지난 5월31일 영국 런던 피카딜리 서커스 전광판에서 상영된 방탄소년단의 팬 메시지 영상. [사진 트위터]

“문화권에 따라 전통적 성 역할을 강요받기 마련인데 정답이 없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거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것만 봐도 그렇고요. 남자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는 선입견을 깨는 거죠. ‘미투 운동’ 이후 유해한 남성성에 대한 대안으로서도 시의적절합니다.”
 
일부에서는 예쁘장한 외모와 옷차림으로 무장한 K팝 보이그룹을 ‘게이팝’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멤버들 사이의 거리낌 없는 스킨십도 공격 대상이 됐다. 그는 “그것이야말로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생겨나는 오해”이자 “대중문화에서 더 많은 롤모델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음악은 항상 앞장서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역할을 해 왔잖아요. 현실을 반영해야 하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젊은 청중들과 만나 소통하다 보니 더 자유롭고 유연하죠.”
 
그리니치대에서 이탈리아 호러 영화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2003) 등을 보며 한국식 스릴러에 빠져들었다. 2016년 10월 미디어 기호학 수업을 위해 유튜브에서 자료를 찾던 중 ‘보이 미츠 이블(Boy Meets Evil)’ ‘피 땀 눈물’ 등 뮤직비디오를 보고 BTS에 ‘입덕’했다.
 
그는 “장르 간 경계가 허무는 크로스오버가 한류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6년 런던 한국영화제가 처음 시작됐을 때 한국 대중문화의 영향력이 이렇게 빨리 커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어요. 일본은 애니메이션·게임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이 확산돼 가고 있었지만 한국은 영화밖에 없었거든요.”
 
아이돌 출신 배우들이 늘어나고, 영화와 드라마 간 협업이 활발해지면서 한류 소비층의 외연도 확장됐다는 분석이다. “이제 기존 한국 영화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넷플릭스의 ‘킹덤’을 보고, 한국 음악을 들어본 적 없던 사람들도 BTS를 이야기해요.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어요. 원어로 콘텐트를 즐기는 데 관심을 갖게 된 거죠. 지금의 현상이 어떻게 발전돼 나갈지 한국 문화의 오랜 팬이자 학자로서 기대됩니다.”
 
글=민경원 기자, 사진=우상조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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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장수 브랜드]⑨ '여~자가' 꼰대에 욕먹던 광고, 韓 최장 여성브랜드 된 비결

[한국의 장수 브랜드⑨]신세계인터내셔날 톰보이  

 
 
‘천만 번을 변해도 나는 나, 이유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다.’
 
톰보이가 1993년 선보였던 광고카피다. 지금 보면 딱히 생소하지 않은 문장일 수 있다. 하지만 1993년에는 달랐다.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이런 문장은 도발적이었다. 당시 나이가 지긋하고 보수적인 일부 사람은 이 광고 모델을 두고 ‘싸가지(예의·배려를 속되게 이르는 말)가 없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당시로서는 도발적인 이미지는 속칭 ‘신세대’라고 불리는 젊은이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개성을 추구하는 신세대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면서 유행을 선도하는 브랜드로 올라섰다.
 
197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197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43년…국내 최장수 여성 캐주얼브랜드

 
198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198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여성 캐주얼패션(casual fashion) 브랜드는 대체로 수명이 짧다. 유행에 민감한 소비자가 많고 트렌드도 빨리 바뀐다. 그래서 장수브랜드는커녕 채 5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는 브랜드가 대부분이다.  

 
199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199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빠르게 달라지는 여성 캐주얼패션 시장에서 스튜디오톰보이는 국내 최장수 브랜드라는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다. 1977년 고(故) 최형로 회장이 ‘톰보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한 순수 국내 패션 브랜드다. 국내 패션업계서 드물게 43년 역사를 버텨내는데 성공했지만 톰보이가 지금처럼 시장에 자리 잡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하던 당시 한국 분위기에서 최형로 회장은 중성적인 여성 이미지를 강조하는 브랜드명(톰보이)을 선택한다. 톰보이는 활발하고 다소 남성성을 갖춘 10대 여성을 일컫는 용어다. 재래시장·양장점이 유행하던 당시 톰보이는 국내 브랜드로는 드물게 청바지·맨투맨티셔츠를 판매하며 화제에 오른다.
 
창업 당시에는 사람들이 옷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재질이었다. 디자인이나 브랜드에 담긴 의미 등을 떠나 편안한 소재인지 여부가 중요했던 시절. 그런 시절에 최형로 회장은 섬유기업을 하나의 '패션 기업'으로 바꿔놨다. '캐주얼 의류'라는 용어도 톰보이 덕분에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르면 브랜드 이미지도 빛이 바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중가 패션 브랜드 판매량이 급감한다. 톰보이도 상당한 위기에 부딪혔다.
 
200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200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해외 브랜드의 공습 때문이다. 이른바 '패스트패션(fast fashion)'이 국내 패션 업계를 강타한다. 유니클로·자라·H&M·망고 등이 서울 명동 등 국내 상권은 물론, 국내 주요 쇼핑몰에 등장했다. 이들은 당시 국내 브랜드보다 최대 절반 가량 저렴한 상품을 내세우고, 신상품을 한 달에 두 차례나 선보이면서 국내 소비자를 사로잡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톰보이는 가격대를 낮추고 생산·제조, 유통·판매까지 의류 생산 전 과정을 담당하는 일종의 스파(SPA) 브랜드를 벤치마킹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유니클로·자라·H&M과 같은 브랜드로 변신한 것이다. 덕분에 2000년대 초반 국내 주요 백화점 여성 캐주얼패션 매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브랜드로 자리 잡는다.
 

신세계 인수…패션계의 불사조 브랜드

 
201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2010년대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두 번째 위기는 2006년 창업주인 최형로 회장이 타개하면서 찾아왔다. 주인을 잃은 톰보이는 재무실적이 악화하자 2009년 인수합병(M&A) 전문가에게 경영을 맡긴다. 하지만 그는 패션사업에 문외한이었다고 한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톰보이는 16억원의 어음을 결제하지 못해 2010년 최종 부도 처리됐다.
 
최종 부도가 나자 톰보이 당시 경기도 소재 물류센터에 사채업자가 몰려들었다. 회수하지 못한 돈 대신 옷이라도 받아가기 위해서였다. 톰보이는 사설 경호업체를 동원해 이들과 대치했다. 재고까지 사라지면 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다.  
 
실적악화·부도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톰보이가 불사조처럼 되살아난 건 2011년 신세계인터내셔날이 톰보이를 인수하면서다. 당시 신세계인터내셔날은 톰보이의 지분 97.1%를 인수하고 브랜드 재건 작업을 시작한다.  
 
2012년 2월 초 AK플라자 수원점에 매장을 열면서 백화점 영업을 재개했고, 디자인·가격 측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2012년 론칭 당시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2012년 론칭 당시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일단 당장 유행하는 디자인에 집중하기보다, 톰보이만의 차별화한 디자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중성적이고 소년스러운 느낌을 벗어나, 세련되면서도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여성 패션 디자인으로 탈바꿈했다. 덕분에 톰보이는 수입 여성 캐주얼패션 의류와 경쟁이 갈수록 심화하는 상황에서도 소비자의 선택을 받고 있다.
 
또 스파 브랜드와 경쟁이 가능한 합리적인 가격도 톰보이의 부활 요인 중 하나다. 2012년 브랜드 재시작 당시 톰보이는 ‘클린 스마트 프라이스(clean smart price)’를 선언한다. 제품 가격을 책정 단계부터 공정하고 투명하게 공개해 고객·생산자 모두에게 이익을 되돌려주자는 취지에서다. 덕분에 영캐주얼(young casual) 브랜드 대비 20% 저렴하게 판매 가격을 책정할 수 있었다. 실제로 2012년 당시 톰보이는 트렌치코트를 20만원대, 바지를 10만원대, 티셔츠를 3만9000원~6만9000원대, 블라우스를 10만원 대에 판매했다.
 

디자인 차별화로 중국 시장 공략  

 
스튜디오톰보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매장 외관.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스튜디오톰보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매장 외관.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신세계인터내셔날은 2016년 하반기 톰보이를 ‘스튜디오톰보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한다. 톰보이의 브랜드 역사는 유지하면서, 로고·콘셉트·제품·매장인테리어까지 재정비했다. 글로벌 시장에 대응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톰보이가 단 한 가지 콘셉트로 제품을 선보였다면, 스튜디오톰보이는 다양한 소비자 취향을 반영할 수 있도록 디자인·가격대에 따라 5가지 라인으로 브랜드를 확장했다. ▶아틀리에라인(최상위 제품군·타임리스 컨템포러리 라인) ▶스튜디오 라인(기존 톰보이의 인기 디자인을 계승한 라인) ▶에센셜 라인(라운지의류라인) ▶액세서리 라인(가방·보석·액세서리 등) ▶키즈 라인(어린이 의류) 등이다.
 
2016년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한 스튜디오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2016년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한 스튜디오 톰보이.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또 스튜디오톰보이의 매장을 전시공간으로 활용해 국내·외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알리고 있다. 미국의 삽화가 이안 스크라스키’와 협업한 의류가 인기를 끌었고, 미국 패션 일러스트레이터 리차드 하인즈가 그린 코트 화보를 주요 매장에 전시하기도 했다. 판화작가 김타코와 협업하거나 주요 매장에서 목판화·그림을 전시하면서 다른 여성 캐주얼 브랜드와 차별화한 브랜드 이미지를 확보했다.
 
덕분에 지난해 스튜디오톰보이 매출액은 1125억원을 기록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이 톰보이를 인수한 직후 매출규모(394억원)와 비교하면 2배 이상 많이 팔리는 셈이다. 2020년까지 매출액을 2000억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목표다.
 
스튜디오톰보이가 올해 가을겨울용 상품으로 선보인 시즌 제품.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스튜디오톰보이가 올해 가을겨울용 상품으로 선보인 시즌 제품. [사진 신세계인터내셔날]

 
국내 시장에서 영역을 넓힌 스튜디오톰보이는 이제 글로벌 브랜드로 변신하고 있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스튜디오톰보이를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하기 위해서 4월 중국 베이징·서안에 위치한 SKP백화점에 단독 매장을 각각 개점했다. SKP백화점은 중국 고급 백화점이다. 스튜디오톰보이는 이후에도 점진적으로 중국 매장을 확대할 계획이다.
 
신세계인터내셔날은 “국내 여성 캐주얼 패션의 역사가 담긴 스튜디오톰보이를 해외에서도 사랑받는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문희철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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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적 남성성 재정의 해야"…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의 성평등 - 중앙일보 preLoad Image preLoad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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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적 남성성 재정의 해야"…스웨덴 ‘남성 페미니스트’의 성평등

40여년 전에 세계 최초로 정부 기구에 성평등위원회를 설치한 나라 스웨덴에서 “성평등을 위한 노력은 여성들만의 몫이 아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 비영리 페미니즘 단체 '맨'(MAN)이 있다.
이 단체는 기존의 성평등 운동이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 철폐’ 등 주로 여성을 주체로 했던데 반해 “남성성을 재정의해 성평등을 실현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1993년부터 활동해온 비영리 페미니즘 단체 맨(MAN)의 로고 [사진 맨(MAN) 페이스북]

1993년부터 활동해온 비영리 페미니즘 단체 맨(MAN)의 로고 [사진 맨(MAN) 페이스북]

26일 주한스웨덴대사관에서 만난 맨(MAN)의 프로젝트 매니저 샤하브 아마디안(35)은 “성평등이라는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남성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성성 새롭게 정의, 폭력과 연결 고리 끊어야"
비영리 페미니즘 단체 맨(MAN)의 프로젝트 매니저 샤하브 아마디안(35)이 26일 오후 주한스웨덴대사관에서 남성성의 재정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유진 기자

비영리 페미니즘 단체 맨(MAN)의 프로젝트 매니저 샤하브 아마디안(35)이 26일 오후 주한스웨덴대사관에서 남성성의 재정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권유진 기자

기자였던 아마디안은 일을 그만두고 스웨덴 감옥에 있는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때 수감자들이 “스스로의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배웠다”고 털어놓는 걸 보며 남성성과 폭력의 연결 고리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아마디안은 남성 역시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는 가부장제의 희생자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부장제는 얼핏 보면 남성들에게 많은 장점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개인 하나하나를 보면 그렇지 않다”며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남성적이지 못하다고 여겨져 자제하게 되고 결국은 후회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평등 선진국인 스웨덴에서도 “남성성을 재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마디안은 “5년 전 이 활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했다”며 “매주 몇 개씩 협박 메일을 받기도 했다”고 밝혔다.
 
현재는 이들의 주장은 사회적 담론으로 부상해 언론ㆍ정치 등 공적인 영역에서 주요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 아마디안은 지난 5년간 활동을 하며 이룬 가장 큰 성과로 “남성성에 대한 얘기를 보편적으로 알리고 이로 인해 남성들이 어떻게 남성성을 얘기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을 꼽았다. 그는 “기존의 페미니스트들과 연대하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서도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안티 페미니즘’도 생겨나고 있다”고 전했다.  
 
"혐오 만연한 SNS에서 충돌 옳지 않아"
그렇다면 성별 갈등이 스웨덴에서도 주요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는 걸까. 아마디안의 대답은 “아니다”였다. 그는 “성별 갈등이 없진 않지만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며 “파시스트적 관점에서 ‘안티 페미니스트’가 된 일부 남성이 있지만 이들은 공공토론의 영역에 진입하지 못하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만 얘기되는 수준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그들이 얘기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혐오가 만연하는 SNS에서 그들과 충돌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마디안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말했다. 그러나 “강연에 나가면 절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소개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면 그 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남성들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며 “그래서 택한 방법은 일명 ‘뒷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으로, 개인의 입장에 서서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이해하고 얘기를 펼처 나간다”고 말했다.  
 
"‘라떼파파’ 스웨덴 전체 얘기는 아냐"
아마디안은 3살짜리 딸을 키우는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라떼파파’(한 손에 카페라테를 들고 다른 손에 유모차 핸들을 잡은 아빠라는 뜻으로 육아에 적극 나서는 아빠를 의미)가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 일부 지역에서는 흔히 보이는 모습이지만 스웨덴 전역을 상징하는 말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아마디안은 “시골은 여전히 육아휴직을 하지 않는 아빠들이 흔하고 전통적인 남성성이 득세하는 곳이라 ‘라떼파파’는 먼 얘기다”고 말했다. 이어 “시골에 살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은 너무 멀고 힘든 일일 수 있다”며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다가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아마디안은 지난 25일 북유럽대사관이 주최한 NORDTalks 행사를 위해 방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가부장제는 지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남자답다고 여겨지는 체계”라며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서 남성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내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서지현 검사가 25일 북유럽대사관이 주최한 NORDTalks 행사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주한스웨덴대사관 제공]

국내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서지현 검사가 25일 북유럽대사관이 주최한 NORDTalks 행사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주한스웨덴대사관 제공]

국내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도 참석해 고위 공직자로부터 받은 부당한 성적 대우와 좌천을 겪은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며 “제 꿈은 우리 아이들 세대에서는 완전한 성평등을 성취해 미투 운동이 먼 과거의 일로 여겨지는 것”이라 말했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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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카르멘·토스카…왜 오페라 여주인공은 다 죽을까

기자
한형철 사진 한형철

[더,오래] 한형철의 운동화 신고 오페라 산책(2)

 

오페라는 낯설다. 어렵고 비싸다는 편견도 많다. 삶을 노래하고 때론 춤추고, 대화를 나누는 오페라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종합예술이다. 청바지 입고, 운동화 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오페라 산책에 나서보자. <편집자> 

 
귀뚜라미 우는 가을밤, 오페라의 유혹에 빠져 보시겠습니까? 아직은 오페라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로 선입견이나 거부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심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겠지요. 한국인이 열광하듯 좋아하는 화가는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클로드 모네와 빈센트 고흐 등이 있습니다. 허나 그들의 그림들도 당시에는 낯설고 생소했기에 인정받지 못했고, 심지어는 조잡하거나 완성하지도 않은 그림 같다며 조롱당하기까지 했었답니다.
 
오페라를 처음 접하시는 경우, 처음에는 용어와 특징 등을 조금 알게 되면 훨씬 이해가 쉽고 마음이 열리게 된답니다. 다소라도 공부하면 ‘나도 오페라 애호가’가 될 수 있지요.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무엇을 미리 알아두어야 할까요? 오페라를 즐기기 위해 필요한 비법 3가지를 알려드릴게요.
 
먼저, 오페라는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나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리골레토’, ‘아이다’, ‘카르멘’, ‘돈 조반니’ 등입니다. 눈치채셨겠지만, 모두 오페라 제목이 주인공 이름이랍니다. 기본적으로 외국어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도 있기에, 일부러 외우기보다는 자주 접하면서 서서히 익히시기를 권합니다.
 
겁탈당한 딸의 복수를 다짐하는 오페라 '리골레토'.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 [사진 의정부 예술의 전당]

겁탈당한 딸의 복수를 다짐하는 오페라 '리골레토'. 오페라 '리골레토' 공연. [사진 의정부 예술의 전당]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작의 시종 광대입니다. 바람둥이인 공작이 여러 여자를 희롱하고 겁탈하는 지저분한 행태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리골레토에게는 끔찍이 사랑하는 딸, 질다가 있지요. 질다 역시 신분을 모른 채 교회에서 만난 학생(공작)과 사랑에 빠졌답니다. 그런데 공작이 질다를 겁탈하고 또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딸의 사랑을 짓밟은 공작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리골레토, 허나 질다는 여전히 그를 사랑합니다.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아이다는 에티오피아 공주입니다. 지금은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패해 노예로 끌려와 이집트 공주인 암네리스의 시녀로 있지요.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는 아이다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사실은 암네리스도 라다메스를 사랑한다는 것이랍니다. 공주와 그 공주의 시녀가 서로 삼각관계로 얽혀 있는데, 이들의 엇갈린 사랑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카르멘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집시여인입니다. 오늘은 이 남자를 내일은 또 다른 이성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여자지요. 그녀를 사랑하는 돈 호세는 나름 명문가의 순수남입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헌신할 수 있는 남자가 자유로운 집시를 사랑하는 상황이지요. 둘 사이에 투우사로서 강한 남성성을 내세우는 에스카미요와 호세의 어머니가 정해주신 고향의 정혼녀 미카엘라가 출현하면서, 카르멘과 돈 호세의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됩니다. 담배 연기같이 매운 이들의 치열한 사랑의 끝은 어디일까요?
 
이처럼 주인공과 등장인물을 알게 되면, 그들 간의 사랑과 분노 또는 음모 등의 스토리 전개가 어찌 되는지 쉬이 이해할 수 있답니다. 이를 놓치게 되면 심지어 비싼 돈 내고 오페라를 보긴 했는데 무엇을 보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게 됩니다.
 
오페라에서는 특히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녀를 ‘프리마 돈나’라고 합니다. ‘최고의 여자가수’라는 뜻이지요. 여성들은 다소 불편한 일이지만, 오페라의 프리마 돈나는 대부분 죽습니다. 그 방법도 참 다양해서 토스카는 성벽에서 뛰어내리고, 카르멘은 애인의 칼에 찔리고, 아이다는 연인과 함께 동굴에 생매장당하지요.
 
왜 오페라의 여주인공은 다 죽을까요? 그 이유는 오페라의 탄생이 그리스의 비극을 부활시키고자 하는 목적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세상의 모든 악과 슬픔을 여성의 죽음으로 씻어내고자 한 것이지요. 사람들은 희극보다 비극에서 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하더군요. 실컷 울고 나면 속이 후련해진다는 말들도 하잖아요.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 작곡가와 작품의 배경에 대해 조금만 알아두어도 오페라를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 작곡가와 작품의 배경에 대해 조금만 알아두어도 오페라를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습니다. [사진 Wikimedia Commons]

 
등장인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아리아입니다. 등장인물이 부르는 아리아, 그 속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모두 담겨 있답니다. 아름다운 사랑, 안타까운 이별, 간교한 계책과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노래. 오페라에서 가수가 멋지게 아리아를 부를 때, 우리는 환호하며 오페라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실 아리아를 듣다 보면, 의외로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많답니다. 드라마나 연예프로 또는 CF에 유명한 오페라 아리아 선율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이지요.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 음악을 오페라를 감상하다가 듣게 될 때, “아~ 이거 내가 아는 건데!” 하는 뿌듯함은 대단하답니다. 특히 요즘에는 유튜브 등에서 하나의 아리아를 여러 가수 버전으로 비교해 볼 수 있어서 즐거움은 더욱 커지지요.
 
마지막으로 작곡가와 작품의 배경에 대해 조금 알아두면 훨씬 재미를 느낄 수 있답니다. 우리는 이미 학교에서 모차르트, 로시니, 베르디, 비제, 푸치니 등등 많은 작곡가에 대해 배웠고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있으실 거에요. 모차르트는 재치와 장난기 넘치고 로시니는 다재다능한데, 이런 작곡가의 특성을 미리 안다면 오페라가 더 재미있게 다가옵니다.
 
작품의 배경을 안다면 작품을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요. ‘피가로의 결혼’은 18세기 후반 대혁명 직전의 무너져가는 봉건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세비야의 이발사’는 자본주의가 성장한 19세기 초의 변화하는 시대 상황을 보여준답니다. 오페라가 어렵다는 편견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관심을 갖고 알아가면 그 즐거움과 행복은 두 배가 됩니다.
 
오페라해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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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 3명 중 2명, 남자만 군대 가는 건 차별”

20대 남성 3명 중 2명은 남자만 군대에 가는 현행 징병제를 성차별이라고 판단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연합뉴스]

20대 남성 3명 중 2명은 남자만 군대에 가는 현행 징병제를 성차별이라고 판단했다는 보고서가 나왔다. [연합뉴스]

20대 남성 3명 중 2명은 남자만 군대에 가는 현행 징병제를 성차별이라고 인식했다.  
 

‘남성다움’ 거부 성향 뚜렷
페미니즘 반감은 특히 높아

마경희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정책연구실장은 18일 열린 연구원 개원 36주년 기념세미나에서 발표한 ‘변화하는 남성성과 성차별’이라는 제목의 발제문을 통해 이같이 발표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해 10~11월 전국 만 19∼59세 남성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 20대 남성의 72.2%는 “남자만 군대에 가는 것은 차별”이라고 답했다. 30대는 62.9%, 40대는 55%, 50대는 50.1%로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비율이 감소했다.
 
‘군대에 가능하면 안 가는 것이 좋다’는 문항에도 20대의 82.6%가 그렇다고 밝혔다. 30개(75.3%), 40대(70.6%), 50대(51.8%)는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외에도 20대는 ‘군복무는 시간낭비’, ‘잃는 것이 더 많은 군복무’라는 의견에 각각 68.2%, 73.5% 공감을 나타냈다. 40∼50대 중장년층은 경쟁·성공·위계·복종 등 전통적 남성성이 강했지만 20대는 비전통적 남성성이 강했다. 30대는 두 남성성이 혼재한 과도기적 남성성이 우세했다.  
 
마 연구실장은 “(이런 경향은) ‘개인’으로서 개성과 인격이 존중받는 사회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이상과도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20대 남성들은 다른 세대에 견줘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특히 높다”며 “이는 군 복무에 대한 부정적 인식, 디지털 세대로서 이들이 온라인 공간에서 경험한 ‘젠더 전쟁’의 효과”라고 분석했다. 이어 “변화하는 남성성과 전통적 남성성을 강요하는 징병제 간 극단적 불화관계를 보여준다”며 “징병제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했다.
 
마 연구실장은 “20대 남성을 모두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가진 동질적 집단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페미니즘의 언어를 통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성평등이 남성의 삶의 변화에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남성 역시 적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연구결과를 토대로 “청년 남성에게 ‘남자다움’을 강요하는 사회제도, 시스템, 문화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영혜 기자 han.younghy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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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재 母 "교도소서 청춘 보냈는데···진작 못밝히고 이제와서"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화성 연쇄살인 사건 유력 용의자 이춘재(56)는 평소 연쇄살인범이라고 의심하기 어려울만큼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지인들의 증언이 나왔다.
 
5일 방송된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춘재의 범행에 대한 전문가 분석과 주변 인물의 증언을 전했다. 이춘재의 지인들은 "겪어본 사람들은 착했다고 할 것"이라며 그가 흉악 범죄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입을 모았다.
 
이춘재가 청주에서 처제를 잔혹하게 살해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음에도 이춘재의 지인들은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춘재의) 아버지가 우리 선배였는데 사람 좋았다"며 가정 폭력이나 학대 문제 또한 없었다고 말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방송에서 전문가들은 이춘재가 남성성과 성적 능력에 대해 위협을 느낀 적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성범죄의 70-80%는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수치심을 지우고자 하는 심리적 요인 탓에 발생한다는 연구 결과에 따른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이춘재의 군 복역 시절 동기는 성추행 관련한 질문에  "기수별로 나가는 군대 생활을 했다. 그런 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동기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며 "(이춘재가) 전차 조종수였다. (문제 있었다면) 사고가 났을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춘재 범행 동기를 유추할 수 있는 증언도 나왔다. 범죄심리학자인 표창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춘재가 '유령처럼 존재감 없었다'는 동창의 말에 주목했다. 표 의원은 "순종,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습성화된 것"이라며 "내면에는 분노와 공격성이 있었을 가능성 높다"고 설명했다.
 
표 의원은 또 "(처제 살인사건은) 처가 가출을 했으니 홧김에 저지른 것"이라는 이춘재 모친 인터뷰에 대해서도 "아들에 대한 과보호 형태다. 무엇인가 감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춘재의 어머니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날벼락같다. 세상에 1, 2년도 아니고 지금 20년이 다 됐다. (아들이) 교도소 들어가서 이팔청춘 다 바쳤다"며 "그런데 그거를 진작 못 밝히고 왜 이제 와서 그러냐"라며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처제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꼭 말로만 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모든 정황으로 볼 때 굉장히 뉘우친다. 반성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SBS '그것이 알고싶다' 캡처]

 
이춘재의 어머니는 착실히 직장 다니며 용돈까지 쥐여주는 착한 아들로 기억했지만 이춘재가 폭력적 성향을 보였다는 사실은 판결문에서도 드러났다.
 
1994년 처제 살인사건 당시 법원 판결문에는 "이씨가 내성적이나 한번 화가 나면 부모도 말리지 못할 정도의 성격"이라며 "아들을 방안에 가두고 마구 때려 멍들게 하는 등으로 학대했다"는 사실이 적시돼 있다.
 
또 "93년 6월 이씨의 동서가 있는 자리에서 아내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재떨이를 집어 던지며 손과 발로 무차별 구타했다. 아내가 93년 12월 17일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굴, 목, 아랫배 등을 마구 때려 하혈까지 하게 만들었다"는 내용도 판결문에 포함됐다.
 
이춘재가 강제 성행위를 요구했다는 부인의 진술에 관해서 박지선 사회심리학자는 "(이춘재가) 피해자의 삶을 통제하며 신이 되는 것"이라며 상대방을 통제하며 자존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춘재는 처제를 살해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과거 화성 사건 피해자에게서 나온 DNA와 수감자 DNA 대조하던 경찰은 이춘재를 범인으로 특정했다. 이춘재는 최근 화성 사건을 포함한 14건의 살인 사건과 성폭행·성폭행 미수 사건 30여 건을 자백한 상태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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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트 108초 광고 어떻길래…불매운동 꺼내드는 남성들

질레트가 13일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 중 일부. [사진 질레트 유튜브 영상 캡처]

질레트가 13일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 중 일부. [사진 질레트 유튜브 영상 캡처]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남성’(The Best Men Can Be)은?
 
이런 내용을 다룬 한 면도기 광고를 놓고 서양 네티즌 사이에서 찬반 논쟁이 일고 있다. “시대 변화에 맞는 새로운 남성성을 선보였다”는 칭찬과 “수십년간 남성성을 부각해 광고를 만들어놓고 이제 와 남성성을 모욕하느냐”는 반론이 맞서면서다.
 
미국 P&G 산하 면도기 브랜드 질레트가 유튜브에 13일 공개한 1분 48초짜리 광고 영상은 22일(한국 시간) 오전 기준 조회 수 2400여만회를 기록하고 있다.  
 
질레트는 브랜드 창립 30주년을 맞아 그동안 사용해왔던 ‘남자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The Best A Man Can Get)이라는 슬로건을 버리고 ‘당신이 될 수 있는 최고의 남성’(The Best Men Can Be)이란 슬로건을 내걸었다.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의 연장선 상에서 ‘우리는 믿는다’(We Believe)는 말도 덧붙였다.
 
질레트가 13일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 중 일부. [사진 질레트 유튜브 영상 캡처]

질레트가 13일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 중 일부. [사진 질레트 유튜브 영상 캡처]

새로운 슬로건 하에 만들어진 이 광고는 ‘미투’ ‘왕따’ 관련 사건을 보도하는 뉴스 소리로 시작한다. 이후 여성을 성희롱하거나 아이들이 싸우는 것을 방관하는 남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다음에 묻는다. “이것이 남자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인가?”(Is this the best a man can get?)
 
질레트가 13일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 중 일부. [사진 질레트 유튜브 영상 캡처]

질레트가 13일 유튜브에 공개한 광고 영상 중 일부. [사진 질레트 유튜브 영상 캡처]

그동안 많은 면도기 광고는 미녀에게 키스를 받는 근육질 남성 등 강한 남성성을 강조했기에 이 광고가 공개되자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선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특히 남성 소비자들의 반발이 심한 모양새다. 이들은 “이 광고가 모든 남성을 안 좋게 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 광고가 올라온 유튜브는 “긍정적인 댓글을 찾아보기 어렵다”와 같은 의견처럼 비난이나 조롱 댓글이 주를 이룬 상태다. “덕분에 다른 면도기 브랜드를 알게 됐다”는 글이나 해당 면도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사진이 SNS에 올라오는 등 불매 운동으로 이어질 조짐도 보였다.   
 
이처럼 해당 광고는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으나 회사 측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정면돌파한다는 입장이다.
 
P&G 측은 “이 광고가 많은 열정적인 대화를 촉발하는 것을 안다”면서도 “최고가 된다는 것이 뭔지 우리가 멈춰 생각할 수 있게 한다. 광고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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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렇게 한남스럽니" 예스24 이메일에 줄탈퇴

예스24가 회원들에게 보낸 메일에 첨부된 사진. 최태섭 칼럼니스트.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예스24가 회원들에게 보낸 메일에 첨부된 사진. 최태섭 칼럼니스트.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온라인 서점 '예스(yes)24'가 운영하는 문화웹진 '채널예스'가 2일 회원들에게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라는 제목의 메일을 발송해 '남성혐오(남혐)' 논란에 휩싸였다. 이 메일은 『한국, 남자』를 쓴 최태섭(34) 칼럼니스트의 인터뷰 내용을 담고 있다.
 
네티즌들은 예스24가 메일 제목에 사용한 '한남'이라는 단어를 문제 삼았다. '한남'은 한국남자의 줄임말로 남성을 비하하는 의도가 담긴 인터넷 신조어다.  
 
이같은 메일이 발송된 후 2일 '남초 커뮤니티'(남성 유저의 비율이 높은 사이트)에는 '예스24' 탈퇴 인증 게시물이 연달아 올라왔다. 3일 오전 커뮤니티 '클리앙'과 '불펜'에서도 탈퇴 인증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한남'이라는 단어에 발끈한 남성들을 비꼬는 댓글도 눈에 띄었다.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클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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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 강***은 "'예스24'의 판매 전략이 천박하다"라고 비판했고, 다른 네티즌 꿀꿀 *****은 "평생을 여자 비하하고 성적 대상으로 소모하는 남자들이 그저 '한국남자'라는 말에 분노하는 모습이라니"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예스24는 아직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편 최태섭이 지난 10월 말 출간한 『한국, 남자』는 한국의 남성성을 분석한 책이다. 출판사인 은행나무 측은 “이 시대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떠오른 젠더 문제에서 지금까지 초점은 여성의 문제에 맞춰져 있었다”며 “저자는 그 나머지 반절, 성별 질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남성성을 중심으로 젠더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고 책을 소개했다.
 
저자 최씨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한국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부적절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며 ’한국 남성들이 ‘상상적 박탈’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 중에는 아버지 세대가 가장으로 누렸던 것을 자신들은 할 수 없음에 분노하는데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누린 것들) 그 전체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최태섭은 성공회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사회학과 박사를 수료했다. 2011년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를 시작으로 『그런 남자는 없다』, 『잉여사회』. 『억울한 사람들의 나라』 등의 책을 썼다. 『한국 남자』는 지난 10월에 출간했다. 
 
 
홍수민 기자 su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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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드레스 입은 남자일 뿐" 치마 입고 오스카 레드카펫 선 빌리 포터 - 중앙일보 preLoad Image preLoad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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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드레스 입은 남자일 뿐" 치마 입고 오스카 레드카펫 선 빌리 포터

배우 빌리 포터가 24일(현지시간)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배우 빌리 포터가 24일(현지시간) 드레스를 입고 레드 카펫 행사장으로 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오스카 시상식 행사에 드레스를 입은 남성배우의 패션 '업'이 화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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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 드레스 차림 오스타 레드카펫 선 남성 배우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간을 연출하고 싶었다"

2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1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 앞서 진행된 레드카펫 행사에서 흑인 배우 겸 만능엔터테이너인 빌리 포터가 '우아한' 올 블랙 드레스를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빌리 포터가 24일 (현지시간) 도움을 받으며 시상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빌리 포터가 24일 (현지시간) 도움을 받으며 시상식장으로 향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평소 '패션 파괴자'란 애칭을 가진 포터는 이날도 그런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포터의 상반신은 남성용 턱시도에 나비넥타이를 맨 정장 스타일, 하반신은 바닥으로 펼쳐진 풀 스커트였다.
이에 대해 한 언론과 갖은 인터뷰에서 포터는 "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간 모습을 연출하고 싶은 의도였고, 자신은 여장 남자인 드랙 퀸이 아니라 드레스를 입은 분명한 남자"라고 말했다. 
 빌리 포터가 24일 (현지시간) 레드 카펫 행사에 앞서 드레스를 입고 있다. [EPA=연합뉴스]

빌리 포터가 24일 (현지시간) 레드 카펫 행사에 앞서 드레스를 입고 있다. [EPA=연합뉴스]

'유별난' 포터의 드레스는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찬시리아노가 제작했다.  시리아노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 미셸 오바마가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입었던 드레스를  디자인한 인물이다.
한편, 이번 오스카 레드카펫 행사에서 배우 감독, 제작 스태프 등 영화인들은 저마다 화려한 패션 스타일을 드러내며 각자의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난해 시상식 때는 '미투(Me too) 운동 영향으로  여배우들의 드레스가 검은색과 흰색 등 전반적으로 무채색의 드레스가 많았던 반면, 이날은 밝고 화려한 색상이 많았다. 김상선 기자
 24일 (현지시간) 미국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레드 카펫 행사에 선 배우 빌리 포터.[AP=연합뉴스]

24일 (현지시간) 미국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레드 카펫 행사에 선 배우 빌리 포터.[AP=연합뉴스]

중국계 영화 배우겸 모델인 젬마 챈이 24일(현지시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리드 카펫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중국계 영화 배우겸 모델인 젬마 챈이 24일(현지시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리드 카펫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할리우드 오스카 시상식에 앞서 열린 레드 카펫 행사에 여성은 드레스, 남성은 정장을 입고 섰다. [EPA=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할리우드 오스카 시상식에 앞서 열린 레드 카펫 행사에 여성은 드레스, 남성은 정장을 입고 섰다. [EPA=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미국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 남녀 배우들이 입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미국 할리우드 돌비극장에서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 남녀 배우들이 입장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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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줄탈퇴 뒤엔 한국 남자 박탈감 있다

[사진 저서 『 한국, 남자 』 표지,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사진 저서 『 한국, 남자 』 표지,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3일 오전부터 남초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터넷 서점 ‘예스24(YES24)’ 탈퇴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회원들은 “예스24 탈퇴하려고 휴면 계정을 활성화했다”며 인증 글을 남겼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한국, 남자』 무슨 책이길래

 
전날 예스24가 운영하는 문화웹진 ‘채널예스’는 회원들에게 『한국, 남자』라는 책의 광고 이메일을 보냈다. 문제는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f라는 제목이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예스24는 젠더 이슈 논란에 휩싸였다. ‘한남’이라는 표현은 최근 일부 여성들 사이에서 한국남자를 비하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예스24가 광고한 『한국, 남자』는 한국의 남성성을 분석한 책이다. 출판사인 은행나무 측은 “이 시대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로 떠오른 젠더 문제에서 지금까지 초점은 여성의 문제에 맞춰져 있었다”며 “저자는 그 나머지 반절, 성별 질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남성성을 중심으로 젠더 문제를 고찰하고자 한다”고 책을 소개했다.
 
최씨는 지난 10월 책을 출간한 뒤 수 차례 인터뷰를 통해 저서를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최 작가는 “한국 남자라는 존재가 요즘 현대사회에서 굉장히 곤란한 존재가 되고 있다”며 군대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한다는 뜻의 ‘군무새’라는 용어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군 경험이라는 게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했다. 그는 “집단 트라우마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특히 박정희 때 군 징병제도를 굉장히 강력하게 만들고 징병 면탈을 매국하는 사람처럼 몰아붙이고, (병역을) 신성화 하고 난 다음에는 더 강력해졌다. (남성들이) 이 안에서 엄청난 폭력이나 위험을 겪게 돼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가 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군 복무 경험 자체가 나에게 트라우마이고 나에게 피해였다고 말하면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에 어떤 경험을 계속해서 정당화할 이유를 찾아내다 보니 군대 얘기를 할 때 남자들의 논리가 굉장히 이상하게 꼬인다”며 문제의 원인을 군대에서 찾지 않고 다른 존재(여성 등)에게서 찾는 현상이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9일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도 “한국 남자라는 존재 자체가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부적절한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며 책을 쓰게 된 동기를 털어놨다.
 
최 작가는 이 책에서 한국 남성들이 ‘상상적 박탈’을 겪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젊은 남성들 중에는 아버지 세대가 가장으로 누렸던 것을 자신들은 할 수 없음에 분노하는데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누린 것들) 그 전체 자체가 허상이라는 것이다.
 
 
최 작가는 “애초에 한국 남성들이 엄청나게 존경 받으면서 가장 노릇을 했던 적도 딱히 없다. 맨날 술 먹고 집에서 난동을 부리는 폭군이었거나 아니면 돈을 열심히 버느라 대체로 집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하는 종류의 가정은 한국에 있었던 적이 별로 없는데, 어디서 그런 원형을 보고서 이야기하는 건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젊은 남성들이 박탈감을 호소하며 드는 근거는 대체로 이런 가부장적인 시대의 아버지가 누린 권위에 관한 것이라는 게 최 작가의 설명이다. “요즘 여자들이 무슨 차별을 받느냐”“남자는 돈 버는 기계다” 등의 호소가 그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박탈감을 호소하는 젊은 남성들은 대개 자신들이 말하는 아버지의 권위나 남성성을 경험하거나 보고 자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게 최 작가의 문제 의식이다.
  
최 작가는 코넬이 말했던 ‘가부장적 배당금’의 문제를 거론하며 결국 우리 사회의 최고 남성성은 ‘능력 있고 돈 많은 남자’라고 설명한다. ‘가부장적 배당금’이란 권력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는 소수의 남자를 제외한 남자들이 이런 남성성의 헤게모니가 존재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남성성을 수호하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은 코어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코어에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없다. 심지어 자신이 남자가 아니라 해도 문제가 없다. 그 언저리에서 남성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만 희생되고 또다른 사람들에게 휘두르는 존재가 된다. 그렇게 해서 지켜낸 남성성의 헤게모니는 결국 남성 내부의 높은 사람들이 다 가져간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의 한국의 남성성에는 미래가 없다고도 진단했다. 최 작가는 “미래를 새롭게 여는 존재는 될 수 없는 것 같다”며 “이 책을 통해 하고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상적인 남자’같은 건 없고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이제는 ‘남성성이라고 불리는 알 수 없는 것’ 말고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저자의 문제의식과는 별개로 남성들은 채널예스의 ‘한남’이 “혐오 표현”이라며 예스24 탈퇴 러시 중이다. 채널예스는 홍보 메일 제목뿐 아니라 최 작가와의 인터뷰 서두에서도 “‘어쩌면 그렇게 한(국)남(자)스럽니?’라는 말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한국남자는 몇이나 될까”라고 썼다. 이 인터뷰에도 항의의 댓글은 이어지고 있다.
 
정은혜 기자 jeong.eunhye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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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 선호 귀남이, 군대 얘기만 앵무새처럼 하는 군무새”

『한국, 남자』(최태섭 지음, 은행나무)

『한국, 남자』(최태섭 지음, 은행나무)

예스24의 ‘한남’ 파문을 몰고 온 『한국, 남자』(최태섭 지음, 은행나무·사진)는 최근 불거진 젠더 문제를 남성성에 초점을 맞춰 고찰한 책이다. 부제가 ‘귀남이부터 군무새까지 그 곤란함의 사회사’다. ‘귀남이’는 남아 선호 사상 세계에서의 아들을 뜻하며, ‘군무새’는 ‘군대+앵무새’란 의미로 입만 벌리면 군대 얘기를 하는 남자를 일컫는 속어다.
 

『한국, 남자』 어떤 내용 담겼기에
젠더 문제 다뤘지만 남성 비하 논란

책은 2000년대 한국 사회 남성성의 가장 큰 특징으로 ‘자기 피해자화’를 꼽는다. “남자는 군대에도 가야 하고 데이트 비용도 내야 하며 결혼하고 나면 돈 벌어 오는 기계가 돼 살아가는 존재인데, 여성들은 권리만 요구하며 남자들의 경제력에 의존해 편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억울한 남자들의 탄생’이다. 그 출발은 “한국 남자의 무능함이 파국적으로 드러난 사건”인 IMF 외환위기다. 1999년 공무원시험의 군 가산점 제도에 대한 위헌 판결은 남성들의 피해의식에 불을 지폈다. 이후 사이버 세계를 중심으로 여성 혐오는 본격화됐고, 청년 남성들의 놀이문화로 자리 잡았다.
 
책 곳곳엔 남성 독자들이 반발할 법한 분석이 여럿이다. 하지만 그 책임을 남성들에게만 뒤집어씌우진 않는다. “21세기의 청년들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렵고, 돈을 모으기도 어렵다. (…) 언제나 가장 먼저 버려지는 것은 청년 문제였다. 똑바로 살라며 훈계하던 어른들은 청년 장사꾼이 일궈놓은 가게 월세를 세 배로 올리고, 대학 기숙사와 청년 임대주택의 신규 건설에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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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사회구조적 문제가 남성들만 괴롭히는 건 아니다. 저자는 “청년 여성들은 좁은 경쟁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였고, 청년 남성들은 세대론을 면죄부 삼아 자기 연민에 빠져들었다”고 못 박는다. 이 책이 남성의 문제를 돌아보자는 취지에서 쓰였다고는 하지만 여성을 일방적으로 미화시켰다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경제적 추락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들을 자신에 대한 역차별로 인지해 공격하고 있다”는 등 30대 ‘한국 남자’인 저자가 물꼬를 터놓은 한국 남성에 대한 자기 인식이 젠더 논쟁 해결의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은 남는다. 
 
이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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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일조량 적은 가을···여성은 정수리, 남성은 이마 허전 - 중앙일보 preLoad Image preLoad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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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가족] 일조량 적은 가을···여성은 정수리, 남성은 이마 허전

남녀유별 탈모 양상 

고대 로마 시대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강력한 남성성을 지닌 역사적 인물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 강인했던 그도 숨기고 싶어 했던 것이 있었다.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이었다. 당시에도 풍성한 머리는 외모의 중요한 조건이었는데, 탈모가 진행되다 보니 상당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탈모 방지를 위해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온갖 민간요법을 다 썼다. 동물의 분비물과 여러 약초를 섞어 머리에 발랐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별 소용이 없었고, 결국 뒷머리를 길러 머리 위로 틀어 올린 뒤 월계관을 써서 대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남녀 탈모 주원인은 유전적 요인
남성호르몬, 모발 생성 가로막아
두피 염증·각질은 별 영향 안 줘

 

햇빛 덜 쬐면 테스토스테론 분비량 증가 

수천 년 전부터 시작된 인류의 탈모 고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남성에서 탈모가 일어나는 원인은 95% 이상이 유전적 요인 때문이다. 머리카락이 심어진 모낭에는 ‘5-알파환원 효소’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이 효소와 만나면 디하이드로테스토스테론(DHT)이라는 물질로 바뀐다. 이 물질이 모낭을 위축시키고 모발을 가늘게 하면서 결국엔 모발이 나지 않게 한다. 
 
탈모 유전 인자가 있는 사람은 이 효소의 양이 다른 사람보다 많다. 가을철에는 일조량이 감소하면서 테스토스테론의 분비량이 늘기 시작해 탈모가 좀 더 진행될 수 있다. 여성 탈모는 어떨까. 강동경희대병원 피부과 심우영 교수는 “여성 탈모의 원인도 90% 이상이 유전 인자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남성보다 탈모 비율이 낮은 이유는 여성의 체내 남성호르몬 분비량이 적기 때문이다.
 
남녀 탈모의 주된 원인은 같지만 양상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남성은 이마 부분이 ‘M’자로 변하면서 이마 위쪽 모발 수가 줄고 정수리 부분 모발도 줄어든다. 여성은 좀 다르다. 앞쪽 모발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정수리 부분만 숱이 적어진다. 남성은 앞머리와 정수리 부분 둘 다 5알파 환원 효소가 존재하지만, 여성은 정수리 쪽에만 분포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은 테스토스테론 분비량이 남성보다 적어서 머리카락이 완전히 없어지는 ‘민머리’ 형태의 탈모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탈모 대부분이 환원 효소가 상대적으로 많은 유전적 요인 때문에 생기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면역체계 이상이다. 면역 체계가 모발을 자기 조직이 아닌 이물질이라고 생각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면역 체계 이상에 의한 탈모는 일반 탈모와 양상이 다르다. 흔히 말하는 원형탈모(두피 몇 군데에서 집중적으로 모발이 탈락함)가 면역 체계 이상에 의한 탈모다. 심 교수는 “류머티즘이나 루푸스처럼 유전적 요인이 강하며, 스트레스는 직접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질환을 일으키는 방아쇠 역할을 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영유아들에게도 꽤 나타난다.
 
여성의 경우 질환에 의해 탈모가 생기는 경우도 많다. 난소에 종양이 있으면 남성호르몬이 과도하게 만들어져 탈모가 생긴다. 철분 부족이나 갑상샘기능항진증이 생겨도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의 불균형을 가져와 탈모가 진행될 수 있다. 출산 시에도 탈모가 일어난다. 고대안산병원 피부과 유화정 교수는 “여성의 몸은 출산 시 아이를 낳는 데 힘을 집중하기 위해 출산과 상관없는 두피의 모낭 쪽으로는 혈액과 영양 성분을 덜 보낸다”고 설명했다. 출산 후 산모의 머리가 많이 빠지는 이유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면 다시 새 머리카락이 나와 1년 안에 회복된다.
 
 

스트레스보다 다이어트가 두발 직격탄 

다이어트도 중요한 요인이다. 우리 몸의 모발이 10만 개 정도인데, 각각 매일 약 0.3㎜씩 자라므로 하루에 자라는 모발의 총 길이는 30m에 이른다. 유 교수는 “그만큼 영양분이 많이 필요한데, 심한 다이어트를 하면 영양 공급 부족으로 탈모가 진행될 수 있다”고 말했다.
 
두피에 염증이나 각질이 많으면 머리가 잘 빠질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꼭 그렇진 않다. 심 교수는 “두피에서 고름이 나올 정도로 심한 염증이 생겼을 때는 당연히 모낭이 망가져 모발이 탈락하지만 염증이나 각질이 좀 있는 정도로는 모발 탈락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각질이 많은 상태서 모발이 탈락한다면 5알파 환원 효소에 의해 원래 탈락하게 돼 있는 모발이 시기가 돼 빠지는 것일 뿐이다.
 
스트레스는 탈모에 영향을 미칠까. 유 교수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 모근에 혈류 공급이 줄어들고 영양분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스트레스가 바로 탈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모발이 휴지기 상태로 들어서는데, 성장기에서 휴지기 상태로 전환되는 과정이 3개월 정도 걸리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현재 모발이 유난히 많이 빠진다면 3개월 전쯤 있었던 큰 스트레스의 영향”이라며 “이런 경우 현재 스트레스 요인이 없다면 3~6개월 후에 모발이 다시 정상화되므로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Tip 탈모 체크리스트
□ 이전보다 이마가 넓어졌다.
□ 정수리 부위 머리카락이 두드러지게 가늘어졌다.
□ 하루에 빠지는 머리카락 수가 100개 이상이다.
□ 50~100개 정도의 모발을 한꺼번에 당겼을 때 3개 이상 빠진다.
□ 가르마를 탔을 때 빈 곳이 점점 넓어진다.
□ 조상이나 가족 중 탈모 증상이 있었던 사람이 있다.
 
*3개 이상에 해당하고 증상이 3개
배지영 기자 bae.ji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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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장르물에 지쳤나…다시 뜨는 로맨스 사극

수목극 선두를 달리고 있는 MBC ‘신입사관 구해령’. 신세경이 조선 최초 여성 사관 역을 맡았다. [사진 각 방송사]

수목극 선두를 달리고 있는 MBC ‘신입사관 구해령’. 신세경이 조선 최초 여성 사관 역을 맡았다. [사진 각 방송사]

장르물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최근 방영 중인 TV 드라마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 tvN ‘시그널’(2016)과 ‘비밀의 숲’(2017)의 잇단 성공 이후 형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 한 명 나오지 않는 드라마를 찾기 힘들 만큼 장르물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 일제히 막을 올린 수목극 4편 중 3편이 장르물을 표방할 정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 마니아층을 위한 장르로 여겨져 지상파 프라임 타임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저스티스’‘닥터탐정’ 등 시청률 고전
엇비슷한 소재 반복 … 피로도 높아져
퓨전사극 ‘신입사관 구해령’ 상승세
‘성균관 스캔들’ 등 인기 이을까 관심

SBS ‘닥터탐정’과 OCN ‘미스터 기간제’는 소재로 차별화를 꾀했다. ‘닥터탐정’은 산업재해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 의사들(박진희·봉태규)이 모인 미확진질환센터(UDC)를 설립하고, ‘미스터 기간제’는 속물 변호사(윤균상)가 명문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기간제 교사가 되어 잠입한다. 사건이 펼쳐지는 배경을 작업현장과 학교로 바꾸면서 기존 장르물과는 결을 달리한 것이다.
 
덕분에 각각 메디컬물과 학원물의 장점을 흡수하는 효과가 생겨났다. 강력 사건과는 전혀 무관할 법한 일상의 공간에 공포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특히 ‘닥터탐정’은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 Y’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잔뼈가 굵은 박준우 PD의 드라마 데뷔작이자 실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송윤희 작가가 만나 취재에도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편. 비정규직 노동자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사망한 실제 사건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KBS2 ‘저스티스’에서 변호사 이태경역의 최진혁. [사진 각 방송사]

KBS2 ‘저스티스’에서 변호사 이태경역의 최진혁. [사진 각 방송사]

반면 KBS2 ‘저스티스’는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스타 변호사(최진혁)와 재벌 회장(손현주), 이에 맞서는 검사(나나)까지 가장 익숙한 장르물을 들고 나왔다. 특정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와 연습생들이 잇따라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큰 골자지만, 기시감을 지우기 힘들다. 돈도 빽도 없는 변호사가 사회권력층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이야기를 이미 너무 많이 본 탓이다. 원작인 장호 작가의 동명 웹소설은 2017년 네이버시리즈 연재 당시 평점 9.9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작이었으나 드라마에서 재가공된 캐릭터는 다소 평면적이다.
 
SBS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 전문의 도중은 역의 박진희. [사진 각 방송사]

SBS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 전문의 도중은 역의 박진희. [사진 각 방송사]

이처럼 세 작품 모두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기엔 역부족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장르물 자체에 대한 피로도라기보다는 소재와 캐릭터 운용 방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닥터탐정’의 경우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오면서 진정성을 확보했지만 뉴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인 톤을 유지하고, ‘저스티스’는 남성성을 과시하고 폭력성을 부각하는 등 현재 트렌드와 맞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장르물 초기 단계에서는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제 시청자들도 해당 문법에 익숙해지면서 향후 전개 방향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계층과 이에 맞서 싸우는 억울한 서민의 구도가 반복되면서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열패감 같은 것도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이는 시청률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1회 6.1%(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하며 선두로 시작한 ‘저스티스’는 방송 2주 만에 4%대로 내려앉았고, ‘닥터탐정’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면 MBC ‘신입사관 구해령’은 4%에 시작해 2배 가까이 올랐다. 장르물 홍수 사이에서 나 홀로 퓨전 사극을 택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지난 5월 ‘봄밤’을 시작으로 드라마 시간대를 오후 10시에서 9시로 1시간 앞당긴 것 역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이림 역의 차은우. [사진 각 방송사]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이림 역의 차은우. [사진 각 방송사]

‘신입사관 구해령’은 최근 강화되고 있는 여성 중심 서사 흐름과도 일치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여인은 나쁜 일도, 훌륭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했다”는 조선 시대에서 최초의 여성 사관 인턴이 된 구해령(신세경)은 “고집은 황소 같고 배짱은 장수 같은 여인”으로서 걸크러시한 매력을 뽐낸다. 한양을 뜨겁게 달군 연애소설가 매화 선생으로 이중생활 중인 둘째 왕자 이림(차은우)과 호흡도 괜찮은 편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사극의 경우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용이하다”며 “여자주인공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 설정해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문제를 제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책비’나 책방을 중심으로 감상이 퍼져 나가는 ‘댓글 문화’ 등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어우러지면서 기존 사극에서 보지 못한 장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장르물은 이야기의 모든 구성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맞물려야 하지만, 퓨전 사극은 역사 고증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고 중간 유입이 쉽다는 장점도 있다. 공희정 평론가는 “장르물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이미 연기력이 검증돼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더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며 “‘성균관 스캔들’(2010)의 송중기나 ‘구르미 그린 달빛’(2016)의 박보검 등 퓨전 사극을 통해 발굴된 배우들처럼 ‘신입사관 구해령’의 차은우가 끝까지 제 몫을 잘해낸다면 그 계보를 이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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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의사·탐정 쏟아지는 장르물 승자는? 조선 최초 여사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도중은 역을 연기 중인 박진희. [사진 SBS]

‘닥터탐정’에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도중은 역을 연기 중인 박진희. [사진 SBS]

 
장르물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최근 방영 중인 TV 드라마를 보면 드는 생각이다. tvN ‘시그널’(2016)과 ‘비밀의 숲’(2017)의 잇단 성공 이후 형사나 검사, 혹은 변호사 한 명 나오지 않는 드라마를 찾기 힘들 만큼 장르물이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17일 일제히 막을 올린 수목극 4편 중 3편이 장르물을 표방할 정도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수 마니아층을 위한 장르로 여겨져 지상파 프라임 타임의 문턱을 넘지 못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방송사 4곳 일제히 수목극 시작
‘저스티스’ ‘닥터탐정’ 등 대결서
퓨전사극 ‘신입사관…’ 승기 잡아
걸크러시 캐릭터로 차별화 성공

 
SBS ‘닥터탐정’과 OCN ‘미스터 기간제’는 소재로 차별화를 꾀했다. ‘닥터탐정’은 산업재해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 의사들(박진희ㆍ봉태규)이 모인 미확진질환센터(UDC)를 설립하고, ‘미스터 기간제’는 속물 변호사(윤균상)가 명문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기간제 교사가 되어 잠입한다. 사건이 펼쳐지는 배경을 작업현장과 학교로 바꾸면서 기존 장르물과는 결을 달리한 것이다.  
 

장르물 지겹다? 병원·학교 등 새 장소 물색

‘미스터 기간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사건 해결을 위해 명문고에 교사로 잠입한 윤균상. [사진 OCN]

‘미스터 기간제’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다 사건 해결을 위해 명문고에 교사로 잠입한 윤균상. [사진 OCN]

 
덕분에 각각 메디컬물과 학원물의 장점을 흡수하는 효과가 생겨났다. 강력 사건과는 전혀 무관할 법한 일상의 공간에 공포감을 불어넣은 것이다. 특히 ‘닥터탐정’은 ‘그것이 알고 싶다’ ‘궁금한 이야기 Y’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잔뼈가 굵은 박준우 PD의 드라마 데뷔작이자 실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인 송윤희 작가가 만나 취재에도 상당히 공을 많이 들인 편. 비정규직 노동자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사망한 실제 사건이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반면 KBS2 ‘저스티스’는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스타 변호사(최진혁)와 재벌 회장(손현주)과 이에 맞서는 검사(나나)까지 가장 익숙한 장르물을 들고 나왔다. 특정 엔터테인먼트 소속 배우와 연습생들이 잇따라 사건에 휘말리는 것이 큰 골자지만, 기시감을 지우기 힘들다. 돈도 빽도 없는 변호사가 사회권력층에 대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이야기를 이미 너무 많이 본 탓이다. 원작인 장호 작가의 동명 웹소설은 2017년 네이버시리즈 연재 당시 평점 9.9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작이었으나 드라마에서 재가공된 캐릭터는 다소 평면적이다.  
 
‘저스티스’에서 스타 변호사 이태경 역할을 연기 중인 최진혁. [사진 KBS]

‘저스티스’에서 스타 변호사 이태경 역할을 연기 중인 최진혁. [사진 KBS]

‘저스티스’에서 범중건설 회장 역을 맡은 손현주. [사진 KBS]

‘저스티스’에서 범중건설 회장 역을 맡은 손현주. [사진 KBS]

 
이처럼 세 작품 모두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기엔 역부족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장르물 자체에 대한 피로도라기보다는 소재와 캐릭터 운용 방식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닥터탐정’의 경우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가져오면서 진정성을 확보했지만 뉴스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인 톤을 유지하고, ‘저스티스’는 남성성을 과시하고 폭력성을 부각하는 등 현재 트렌드와 맞지 않는 구시대적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엇비슷한 소재 반복되며 피로도 높아져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장르물 초기 단계에서는 사건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었지만 이제 시청자들도 해당 문법에 익숙해지면서 향후 전개 방향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졌다”고 밝혔다. 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계층과 이에 맞서 싸우는 억울한 서민의 구도가 반복되면서 “아무리 문제를 제기해도 결국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열패감 같은 것도 생겨났다”고 설명했다.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최초 여성 사관 구해령 역을 맡은 신세경. [사진 MBC]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최초 여성 사관 구해령 역을 맡은 신세경. [사진 MBC]

 
이는 시청률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1회 6.1%(닐슨코리아 기준)를 기록하며 선두로 시작한 ‘저스티스’는 방송 2주 만에 4%대로 내려앉았고, ‘닥터탐정’ 역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반면 MBC ‘신입사관 구해령’은 4%에 시작해 2배 가까이 올랐다. 장르물 홍수 사이에서 나 홀로 퓨전 사극을 택한 것이 주효한 것이다. 지난 5월 ‘봄밤’을 시작으로 드라마 시간대를 오후 10시에서 9시로 1시간 앞당긴 것 역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입사관 구해령’은 최근 강화되고 있는 여성 중심 서사 흐름과도 일치한다. 시경에 이르기를 “여인은 나쁜 일도, 훌륭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 했다”는 조선 시대에서 최초의 여성 사관 인턴이 된 구해령(신세경)은 “고집은 황소 같고 배짱은 장수 같은 여인”으로서 걸크러시한 매력을 뽐낸다. 한양을 뜨겁게 달군 연애소설가 매화 선생으로 이중생활 중인 둘째 왕자 이림(차은우)과 호흡도 괜찮은 편이다.  
 

“퓨전 사극 성차별·계급문제 다루기 용이”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왕자와 사관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차은우와 신세경. [사진 MBC]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왕자와 사관으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차은우와 신세경. [사진 MBC]

 
정덕현 평론가는 “사극의 경우 기본적으로 계급사회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남녀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용이하다”며 “거기에 여자주인공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으로서 설정함으로써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의문을 던지고 문제를 제기하기 용이하다”고 밝혔다. 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책비’나 책방을 중심으로 감상이 퍼져 나가는 ‘댓글 문화’ 등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기존 사극에서 보지 못한 장면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장르물은 이야기의 모든 구성 요소가 톱니바퀴처럼 치밀하게 맞물려야 하지만, 퓨전 사극은 역사 고증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고 중간 유입이 용이하다는 장점도 있다. 공희정 평론가는 “장르물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이미 연기력이 검증돼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 본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더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며 “‘성균관 스캔들’(2010)의 송중기나 ‘구르미 그린 달빛’(2016)의 박보검 등 퓨전 사극을 통해 발굴된 배우들처럼 ‘신입사관 구해령’의 차은우가 끝까지 제 몫을 잘해낸다면 그 계보를 이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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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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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넘은 기업 회장님도 매일 300번씩 한다는 이 운동

기자
유재욱 사진 유재욱
[더,오래] 유재욱의 심야병원(48)
 
남성갱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근육량 늘리기다. 근육이 발달하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촉진된다. 우람한 알통과 초콜릿 복근은 소용이 없다.
 
남성 호르몬 분비에 도움이 되는 근육은 엉덩이 근육, 허벅지 근육이다. 엉덩이와 허벅지는 우리 몸 전체 근육의 6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에 이 부위를 운동해야 근육량이 늘어난다. 운동방법을 자세히 소개한다.
 
1. 골반기저근 강화 운동
골반기저근 강화운동, 일명 '케겔운동'은 골반기저근이 약해진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운동이다. 꾸준하게 '케겔운동'을 하면 전립선 문제와 성기능 저하 개선에 도움을 준다. [사진 유재욱]

골반기저근 강화운동, 일명 '케겔운동'은 골반기저근이 약해진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운동이다. 꾸준하게 '케겔운동'을 하면 전립선 문제와 성기능 저하 개선에 도움을 준다. [사진 유재욱]

 
일명 ‘케겔 운동’이다. ‘아놀드 헨리 케겔’박사는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로 골반기저근 강화 운동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케겔 운동이라고 하면 여성들에게 좋은 운동으로 알려졌지만 남성에게도 좋은 운동이다. 특히 현대인들은 앉아서 일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골반기저근이 약해지고 그것으로 인한 성 기능 저하가 생긴다.
 
4주 동안만 케겔 운동을 해보자. 전립선 문제와 성 기능 저하가 많이 개선될 것이다. 
 
케겔 운동법
1) 먼저 골반기저근을 힘껏 수축시키는 느낌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소변을 보는 중간에 소변을 끊어보자! 이때 수축하는 근육이 골반기저근이다.
2) 항문괄약근에 집중을 해서 힘을 주어 골반기저근을 수축시킨다.
3) 3초간 수축한 후 3초간 힘을 빼고 이완하는 것을 10회 반복한다.
4) 힘을 줄 때 허벅지 등 다른 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2. 브릿지 운동
'브릿지 운동'은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을 동시에 강화하는 운동이다. 이때 엄지발가락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더 좋다. 엄지발가락에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능에 관여하는 포인트가 있어 운동 효과가 배가 된다. [사진 유재욱]

'브릿지 운동'은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을 동시에 강화하는 운동이다. 이때 엄지발가락에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더 좋다. 엄지발가락에는 남성과 여성의 성기능에 관여하는 포인트가 있어 운동 효과가 배가 된다. [사진 유재욱]

 
브릿지 운동은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 근육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는 운동이면서, 브릿지 자세를 취한 상태로 케겔 운동을 하면 골반기저근에 보다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골반기저근이 강화되는 효과도 크다.
 
브릿지 자세에서 케겔 운동이 잘되는 분들은 운동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발 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서보자. 엄지발가락에 중심을 두어 신경을 집중하고 서면 더욱 좋다. 엄지발가락에는 남성과 여성의 성 기능에 관여하는 포인트가 있기 때문에 운동 효과가 배가 된다.
 
브릿지 운동법
1) 위를 보고 바로 누워 팔은 길게 뻗어 손바닥이 바닥을 보게 한다.
2) 발을 어깨 너비만큼 벌리고, 무릎을 90도 접는다.
3) 골반을 천천히 들어올려서 몸통 골반 허벅지가 일직선이 되는 자세를 취한다.
4) 뒤꿈치를 들어 발끝으로 지탱한다. 가능하다면 엄지발가락 쪽으로 무게를 싣는다.
5) 그 자세에서 케겔 운동을 한다.
6) 3초 수축 후 3초간 이완을 10회 반복한다.
 
3. 사이드 스쿼트
'사이드 스쿼트'는 남성호르몬 분비를 돕는 운동이다. 몸에서 가장 큰 근육인 엉덩이, 허벅지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은 남성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킨다. [사진 유재욱]

'사이드 스쿼트'는 남성호르몬 분비를 돕는 운동이다. 몸에서 가장 큰 근육인 엉덩이, 허벅지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은 남성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킨다. [사진 유재욱]

 
모 기업 회장님이 매일 300번씩 해서 90이 넘는 고령에도 젊은 사람 못지않은 스태미나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운동으로 유명하다. 남성성은 결국 남성호르몬이 얼마나 잘 나오느냐에 달려있다.
 
남성호르몬 분비가 잘되려면 근육을 강화하면 되는데, 몸에서 가장 큰 근육인 엉덩이 근육과 허벅지 근육을 강화하면 효과적이다. 운동을 하다 보면 스쿼트만 열심히 해도 팔이나 가슴근육이 발달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것은 남성호르몬 분비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이드 스쿼트 운동법
1) 바로 서서 다리를 어깨 넓이로 벌린다.
2) 오른발을 바깥쪽으로 옮기면서 스쿼트, 다시 선자세로 돌아와서 반대발을 바깥쪽으로 옮기면서 스쿼트를 한다.
3) 이 동작을 10회 반복하면 된다.
4) 상체는 최대한 꼿꼿하게 펴고, 의자에 앉는 느낌으로 허벅지가 바닥과 평행이 될 때까지 앉으면 된다.
 
4. 이상근 스트레칭
엉덩이 깊은 곳에 있는 근육 '이상근'이 짧아지면 음부 신경을 압박, 각종 전립선 문제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상근'을 잘 스트레칭 해주는 것만으로도 좌골신경통을 예방할 수 있다. [사진 유재욱]

엉덩이 깊은 곳에 있는 근육 '이상근'이 짧아지면 음부 신경을 압박, 각종 전립선 문제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상근'을 잘 스트레칭 해주는 것만으로도 좌골신경통을 예방할 수 있다. [사진 유재욱]

 
이상근은 엉덩이 깊은 곳에 있는 근육이다. 이상근 아래쪽에는 골반에서 나온 신경다발이 지나가기 때문에 이상근이 짧아지면 신경을 압박해서 증상이 나타난다. 가장 흔한 것이 좌골신경을 눌러 나타나는 좌골신경통이다.
 
한편 남성의 생식기관을 관장하는 음부신경 역시 이상근 아래쪽을 지나간다. 이상근이 짧아지면 음부신경이 압박되어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주로 발기력 약화, 전립선 문제, 골반통 등이다. 하루에 두 번 짧아진 이상근을 잘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만 으로도 좌골신경통도 예방하고, 남성갱년기도 극복할 수 있다.
 
유재욱 재활의학과 의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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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여성의 은밀한 제모…겨털 기르기도 페미니즘?

나이키위민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해 '겨드랑이 털' 논란을 불러일으킨 광고 사진. 나이지리아 혈통 미국인 싱어송라이터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아나스타샤 뉴크(24)가 모델이다. [사진 나이키위민 인스타그램]

나이키위민이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개해 '겨드랑이 털' 논란을 불러일으킨 광고 사진. 나이지리아 혈통 미국인 싱어송라이터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인 아나스타샤 뉴크(24)가 모델이다. [사진 나이키위민 인스타그램]

 
오른쪽 팔을 목 뒤로 돌려 스포츠브라 끈을 잡아당기는 여성. 강렬한 눈빛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겨드랑이 털, 속칭 ‘겨털’입니다. 최근 나이키위민(nikewomen)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이 광고엔 수많은 댓글이 달려 여성의 ‘겨털’ 논란이 다시 불거졌습니다.  

[알쓸신세] 깎느냐 마느냐, 관습과 페미니즘 충돌

 
“대기업 브랜드의 과감한 결단”이라는 칭찬도 있지만 “굳이 체모를 드러낼 필요가 있느냐”는 반감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논란을 통해 홍보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는 의심스런 눈길도 있고요.
 
탈코르셋, 노브라 캠페인처럼 ‘겨털 드러내기’는 최근 페미니즘 논쟁에서 단골 이슈입니다. 이번 [알쓸신세-고 보면 모 있는 기한 계뉴스]에선 이와 더불어 이슬람권 여성들의 강박적인 제모 문화도 살펴보겠습니다. 털을 깎느냐 마느냐의 선택은 시대 따라, 문화 따라 다채롭게 변해왔답니다.
 
있는 그대로 '겨털'을 드러내는 아름다움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사진작가 벤 호퍼는 2007년부터 ‘자연미(Natural Beauty)’라는 사진 연작물을 발표해왔습니다. 홈페이지(https://therealbenhopper.com)에 공개한 50장 남짓한 사진 속에서 다양한 국적·인종·연령대 여성들은 스포츠브라나 민소매 차림으로 자신의 겨드랑이 털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이들은 “내 몸의 통제력을 잃은 줄도 몰랐다가 이제야 되찾은 느낌”(아만다 파머)이라는 등의 소감을 밝혔습니다.
 
사진작가 벤 호퍼가 2007년부터 발표해 온 ‘자연미(Natural Beauty)’ 시리즈의 일부. 다양한 국적·인종·연령대 여성들이 스포츠브라나 민소매 차림으로 자신의 겨드랑이 털을 노출하고 있다. [사진 벤 호퍼 홈페이지]

사진작가 벤 호퍼가 2007년부터 발표해 온 ‘자연미(Natural Beauty)’ 시리즈의 일부. 다양한 국적·인종·연령대 여성들이 스포츠브라나 민소매 차림으로 자신의 겨드랑이 털을 노출하고 있다. [사진 벤 호퍼 홈페이지]

호퍼는 홈페이지에 이 프로젝트가 “일반적인 패셔너블한 여성의 아름다움과 있는 그대로의 겨드랑이 털을 드러낸 예외적 모습 사이에 토론을 불 지피려 기획됐다”고 썼습니다. 실제로 이 연작 시리즈는 여러 외신들에 소개되면서 화제가 됐습니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처음엔 호퍼가 사진모델에게 겨털을 길러 오라고 요청해야 했지만 요즘은 ‘있는 그대로의 몸’을 드러내고 싶은 여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도 늘고 있다네요.  
 
여름이 다가오면서 많은 여성들이 또다시 겨드랑이 털, 다리 털을 어떻게 제모할지 고민 중일 겁니다. 겨털이 페미니즘에서 논란인 것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는 캠페인에 맞서 ‘미용과 위생에서 각자 선택을 존중하자’는 반론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선택을 존중한다면 겨드랑이 제모를 하지 않는 것도 존중받아야 하는데, 현실에선 그렇지 않지요. 2017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수 겸 연기자인 켈리 쿠말로가 겨털을 드러냈다가 ‘무개념녀’로 소셜미디어에서 조리돌림 당한 게 대표적입니다. 이런 편견에 맞서기라도 하듯 팝스타 마돈나, 마일리 사이러스, 레이디 가가, 영화배우 줄리엣 루이스, 드류 베리모어 등은 카메라 앞에 겨털을 당당히 노출시킨 바 있습니다.
 
 
무슬림 여성들, 정기적인 전신 제모 관습 
특히 이슬람권 여성들의 강박적인 제모 문화가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이슬람 문화권은 근대 서구의 관점에서 볼 때 보수적이고 남녀 차별적인 인권과 문화의식을 보이는 편입니다. 체모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인데요 남성은 수염을 통해 남성성과 힘, 권력을 드러내는 반면 여성은 제모를 통해 가부장제에 순종적인 여성성을 구현합니다.
 
이슬람문화 전문가인 엄익란 박사(단국대 GCC국가연구소)가 펴낸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한울아카데미, 2015)에 따르면 이슬람권에서 다리와 얼굴을 제모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의 형제’로 간주된다고 합니다. 무슬림 여성들은 히잡·부르카 등 몸을 감싸는 복장으로 신체 노출을 삼가는데요, 그럼에도 체모가 타인에게 거북함과 불쾌함을 준다며 한두달에 한번씩 전신 제모를 한다는군요. 머리카락, 눈썹, 속눈썹, 코털 등을 제외하고 음부를 포함해 몸에 난 털을 깨끗이 없애는 게 기본이랍니다. 물, 설탕, 레몬을 섞어 만든 홈메이드 왁싱 제품이 주로 이용된다고 합니다.  
 
이 같은 제모 문화는 비잔틴 제국에 유입된 그리스와 로마 문화의 유산으로 추정된다는군요. 아랍 여성들이 이들 ‘선진국’ 문화를 받아들였다가 점차 종교적 메시지와 결부돼 강력한 관습으로 전해진 셈이지요. 상대적으로 갈색 내지 검은 피부 인종에게 털이 많다보니 이들이 ‘백인 여성의 매끈한 몸’을 추종하며 제모를 더 강박적으로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선지 요즘 신세대 무슬림 여성들은 정기적인 전신 제모를 서구와 구별되는 문화전통으로 고수할지, 페미니즘 차원에서 벗어나야 할 '억압적 관습'으로 볼지 고민하기도 한답니다.  
 
비너스의 탄생.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작, 캔버스에 유채, 1879년. 오르세미술관 소장. [중앙포토]

비너스의 탄생.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작, 캔버스에 유채, 1879년. 오르세미술관 소장. [중앙포토]

 
겨드랑이·다리 털 제모는 미용산업의 세뇌 효과?
겨털 여성 시리즈를 해온 사진작가 호퍼는 겨털 깎기가 지난 한 세기 동안 미용산업계로부터 세뇌된 결과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하는 서양 명화에서도 종종 여신들의 몸이 털 없이 미끈하게 표현됐던 걸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듯합니다. 다만 20세기 들어 안전 면도기가 속속 보급되면서 ‘제모 찬양’이 강화되긴 했지요.  
 
미국 매체 복스는 이와 관련 20세기 초 안전 면도기와 즉석 제모 크림 패키지가 나오고 1920년대 무릎 길이 스커트가 널리 보급되면서 다리털 제모 등이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전했습니다. 1964년 미 여성 15~44세 가운데 98%가 신체 일부를 제모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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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영국 밀레니얼 세대(16-24세) 여성 넷 중 하나는 겨드랑이 제모를 하지 않는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2013년엔 이들 중 95%가 제모를 했는데, 2016년엔 77%로 떨어졌다는군요. 다리털 제모 비율도 소폭 하락(92%→85%)했다 하고요. 면도용 거품이나 제모 크림 등이 피부에 좋지 않다는 인식이 퍼진 데다 ‘겨털 노출’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이 줄어든 결과로 보입니다. 아름다움이나 위생에 대한 관습도 시대와 문화 따라 계속 변한다는 얘기 아닐까요.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ang.co.kr
제모한 겨드랑이에 탈취 스프레이를 뿌리는 모습. 각종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에서 여성의 제모는 남성에 비해 강박적으로 장려되는 경향이 있다.[중앙포토]

제모한 겨드랑이에 탈취 스프레이를 뿌리는 모습. 각종 미디어에 노출된 이미지에서 여성의 제모는 남성에 비해 강박적으로 장려되는 경향이 있다.[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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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명문고 '얼평'에 발칵···남학생 반성 끌어낸 여학생의 선택

미국의 미투(#Me Too) 시위 모습. [로이터]

미국의 미투(#Me Too) 시위 모습. [로이터]

 
“화장실에 갈 때조차 영 불편했어요. 남자애들이 위아래로 훑어보며 자기들이 만든 ‘외모 점수표’의 소수점 이하 숫자를 고칠 것 같았거든요.”

미국 8학군 상류층 고교서 '얼평' 소동
문제 제기→징계·처벌 갈등 증폭 대신
성별 공감·화해 이뤄낸 열쇠는 '대화'

 
 최근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된 ‘얼평(얼굴 평가)’, ‘몸평(몸매 평가)’이 미국 동부의 한 고등학교에서 벌어졌다. 졸업반 남학생들이 동급 여학생들의 외모 순위·점수를 매긴 자료를 만들어 공공연히 돌려보면서다. 화가 난 여학생들이 공식 문제를 제기했지만 학교는 솜방망이 처벌을 결정하는 데 그쳤다. 어딘가 익숙하게 들리는 학내 성별 갈등 이야기다. 워싱턴포스트(WP)가 지난 달 26일(현지시간) 이 사건의 반전 있는 결말을 소개했다.
 
 사건의 무대는 미국 동부 대표 부촌 중 하나인 메릴랜드주 몽고메리 카운티에 위치한 베세스다-셰비 체이스(Bethesda-Chevy Chase, BCC) 고등학교다. 공립학교이긴 하지만 유대인 등 백인이 많이 사는 이른바 ‘미국 8학군’ 지역에 있다. 이 학교는 일반 대학 입시 준비 외에 사고력 위주의 글로벌 대입과정인 국제 바칼로레아(IB)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IB과정 졸업반 학생들 사이에 이달 초 문제의 여학생 외모 점수표가 돌았다.
 
 “3교시 체육 시간이 시작할 때 누가 제 이름이 있다면서 표를 보겠느냐고 물었어요. 외모 때문에 4년 간 식이 장애를 겪어왔던 터라 절대 보고 싶지 않다고 했죠.” 하지만 야스민 베베하니(17)는 정확히 세 시간 뒤, 점수표를 캡처한 사진이 담긴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최하 5.5점에서 최고 9.4점까지.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외모 점수가 매겨진 18명의 여학생 명단 속에서 그녀의 이름과 위치가 눈에 띄었다.
 
 모욕감과 성적 대상화를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한 여학생 10여명은 이튿날 학교 행정실을 찾아가 처벌 및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야스민은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고 참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다”면서 “우리는 (이전과 달리) 변화를 만들어야 할 세대”라고 말했다. 하루 뒤, 학교는 수업 시간 중에 해당 리스트를 작성한 남학생 1명을 찾아내 하루 간의 학내 징계를 명령했다. 학생부에 영향이 없는 수준이었다.
 
'얼평' 피해자 중 하나인 BCC고등학교의 니키 슈미트는 WP와의 인터뷰에서 "친구인 남자애들이 겉으로는 함께 놀면서 몰래 내 순위를 매겼다는 데 배신감을 느꼈었다"고 말했다. [니키 슈미트 페이스북 사진]

'얼평' 피해자 중 하나인 BCC고등학교의 니키 슈미트는 WP와의 인터뷰에서 "친구인 남자애들이 겉으로는 함께 놀면서 몰래 내 순위를 매겼다는 데 배신감을 느꼈었다"고 말했다. [니키 슈미트 페이스북 사진]

 
 여학생들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데 남학생들에게 화살을 돌려 성별 갈등을 키우는 대신, 보다 사려 깊은 제안을 했다. 활동을 주도한 니키 슈미트(18)는 “단순히 처벌을 원했던 게 아니라 우리가 그런 나쁜 행동에 이미 지쳤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고 싶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교감실 앞에 40여명이 모여 “성적 대상화와 여성 혐오가 없는 환경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학교 측을 설득했다. 이틀 뒤 5교시, 가해 남학생과 피해자들을 포함해 IB 프로그램 전체 인원에 달하는 80여명이 참여한 대화의 장이 열렸다.
 
 WP는 이 자리에서 “많은 여학생이 외모 리스트 관련 얘기뿐 아니라, 그동안 학교 내외에서 겪었던 크고 작은 성적 불편함에 대해 솔직하게 토로했다”고 전했다. 회의는 계획했던 시간(45분)을 훌쩍 넘겨 두 시간 반 동안 진행됐다. 여학생들의 피해 고백 다음에는 남학생들의 진심 어린 공감과 반성이 이어졌다. 문제의 점수표를 “지난해 5교시 영어 시간에 친구들과 장난삼아 처음 작성했다”고 고백한 남학생은 잘못을 완전히 시인했다. “아주 부유한 학교에 다니는 백인 남성으로서 가졌던 우월감과 특권 의식에 젖어 순간 ‘바보 같은 결정(stupid decision)’을 했다”고 고백하면서다.
 
 이제 범인과 피해자의 경계를 벗어난 이들은 다 같이 BCC 고등학교 내 피해 재발 방지 써클 회원이다. 남녀 2명이 한 팀이 돼 후배들의 교실에 찾아가 잘못된 남성성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WP는 “남학생들의 여성 외모 평가는 BCC 내에서만 수십 년 동안 은밀히 반복돼 온 일”이라면서 “문제는 지금, ‘#미투(MeToo)’ 운동이 일어나는 현재까지도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고 지적했다. 학생들이 양성 대타협 회의를 했던 지난 달 8일은 우연히도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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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도 벌어진 페미니즘 갈등…관악구 A고에선 무슨 일이 - 중앙일보 preLoad Image preLoad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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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도 벌어진 페미니즘 갈등…관악구 A고에선 무슨 일이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성평화'를 추구하는 동아리가 해체될 상황에 놓이며 갈등을 겪고 있다. [사진 픽사베이]

서울의 한 고등학교에서 '성평화'를 추구하는 동아리가 해체될 상황에 놓이며 갈등을 겪고 있다. [사진 픽사베이]

서울 관악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성(性)평등이 아닌 '성평화'를 추구하는 동아리를 만들었지만 지도교사가 없어 해체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성평화는 기존 페미니즘에서 주장하는 성평등은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3월 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3학년 A군은 학생 자율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한국성평화연대의 도움을 받아 홍보를 시작했다. 한국성평화연대는 남녀의 무조건적 성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남녀 갈등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며 조화를 이루는 성평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 학년에 홍보한 끝에 남학생 3명과 여학생 3명을 모은 A군은 성평화 동아리를 만든 뒤 활동을 시작했다. 매달 모여 토론하고 '남성성과 여성성' '가부장제도와 가분담제도' 등에 대한 칼럼도 작성했다. 
 
'성평등' 아닌 '성평화' 주장
하지만 4월쯤 이들이 쓴 칼럼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가며 성차별 논란이 일자 동아리 활동에 제동이 걸렸다. 논란이 커지자 서울시교육청은 5월10일 공문을 내려보내 실태 파악에 나섰다. 
[중앙포토]

[중앙포토]

 
서울시교육청 확인 결과, 지도교사를 맡았던 B교사는 3~4월 동아리에서 활동한 내용을 본 뒤 학생들이 주장하는 '성평화' 담론과 양성평등의 개념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B교사가 학생들이 토의·토론한 내용을 보니 '가분담제'라는 말을 쓰는 등 전통적 가부장제를 옹호하거나 여성 모성애 강조하는 등 기존 생각했던 성 평등의 가치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는 의견을 전했다"고 말했다.
 
가분담제란 바깥 노동에 남성이 투입되고, 육아와 가사를 여성이 맡는 역할 분담은 생물학적 요인과 사회적 배경에 기반을 둔 효율적인 분담 방식이었다는 주장으로 여성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논리와 상반된다.
 
A군은 서울시교육청이 실태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학교 측이 학생들의 의견을 구하지 않고 자의적 해석으로 우리를 양성평등을 해치는 집단으로 낙인 찍었다"며 반발했다.
 
지도교사 없어 해체 위기 
학생들은 5월 중간고사가 끝난 뒤 B교사와 두 차례 대화를 나눴지만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고 결국 B교사가 지도교사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교육부 지침에 따르면 학생 자율동아리는 지도교사가 없이는 운영할 수 없다. 이에 학생들은 다른 교사에게 이 역할을 부탁했지만, 아직 지도교사를 구하지 못해 해체 위기에 놓여있는 상태다.
 
새로운 지도교사를 구하는 사안에 대해서도 학생과 학교 측의 의견이 갈렸다. A군은 B교사가 지도교사를 그만둔 후 다른 사회 과목 교사에게 지도교사를 부탁했고, 그 역시 맡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B교사가 새로 지도교사를 맡아주기로 했던 교사에게 동아리에 대해 부정적인 내용을 전했고, 이후 새 지도교사가 '못 맡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성평화 동아리는 죽었다"며 지난 18일 서울 낙성대역 2번 출구 앞에서 "성평화 추모집회"를 열며 동아리 존속을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학교 관계자는 학생들이 지도교사를 부탁했을 때 "다른 교사가 '생각해보겠다'는 취지로 말을 한 것을 오해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지도교사가 없다면 자율동아리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며 "아직 동아리 폐쇄가 결정된 것은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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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지도자' 김정은-푸틴, 출신은 정반대 취미는 비슷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TV]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합뉴스TV]

하루 앞으로 다가온 북러정상회담에서 양국 지도자가 어떤 '궁합'을 보여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 사람은 출신은 정반대지만 장기집권 체제를 다졌으며 스포츠광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다른 듯 닮은' 면을 짚어봤다. 
 
가난한 가정 출신에서 러시아 구세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EPA=연합뉴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그려왔다. 가난한 가정 출신인 푸틴 대통령은 스스로 권력의 정점에 올라 장기집권 체제를 다졌다. 반면 김 위원장은 최고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감치 세습 권력을 이어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 주거지역에서 궁핍하게 자란 푸틴 대통령은 1975년 레닌그라드대(현 상트페테르부르크대) 법학대학을 졸업하고 옛 소련 정보기관인 국가보안위원회(KGB)에 투신, 오랫동안 일선에서 첩보 활동에 종사한 '정보통'이다. 16살의 나이로 KGB를 찾아가 요원이 되고 싶다고 문을 두드린 일화는 유명하다.
 
1990년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부시장, 크렘린 총무국 부국장과 제1부실장, 연방보안국(FSB) 국장을 차례로 지낸 푸틴은 1999년 8월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에 의해 총리 대행으로 전격 발탁돼 권력의 길에 들어섰다.
 
같은 해 12월 옐친의 전격 사임으로 대통령 직무대행까지 떠맡은 그는 이듬해 3월 대선에서 50%가 넘는 득표율로 당선돼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에 등극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운 좋게 권력을 물려받아 '올리가르히'(러시아 신흥재벌)의 꼭두각시 노릇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크렘린 입성 후 특유의 카리스마로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에 빠진 러시아 사회를 안정시키며 '구세주'로 떠올랐다.
 
체첸 자치공화국의 독립 시도를 무력 진압하고 경제를 살려 연임에 성공한 푸틴은 3연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에 따라 2008년 5월 권좌를 넘겨준 대신 '실세 총리'로 사실상 지도자 자리를 유지했다.
 
2012년 3월 대선을 통해 다시 대통령직에 복귀한 뒤에는 크림반도 전격 병합으로 서방과 갈등을 빚었고 시리아 내전에도 개입해 중동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유지했다는 평을 받는다.
 
지난해 3월 '4기 집권'에 성공한 푸틴이 오는 2024년까지 임기를 채우면 30년 이상 권좌를 누린 이오시프 스탈린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이어 러시아 현대사를 통틀어 두 번째로 오래 집권한 지도자가 된다.
 
20대에 권력 세습…국제사회 들었다 놨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산책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지난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중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산책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 위원장은 스위스 베른의 공립학교에서 유학하며 일찍부터 서구 세계를 경험했다.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온 김 위원장은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하고 포병부대에서 복무했다. 2010년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당 중앙위원회 위원을 거치며 후계자 수업을 받았다.
 
2011년 12월 김정일 위원장의 사망으로 20대 후반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북한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른 그는 한동안 핵·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며 미국 등 국제사회와 대립했다.
 
그러다 지난해 6월 전격적으로 트럼프 대통령과의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4월 기존의 '핵·경제 병진' 노선 대신 '경제건설 총력집중' 노선을 채택하고 올해 신년사에서 경제와 자력갱생에 방점을 찍는 등 경제 살리기에도 주력하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1차 회의를 통해 '김정은 2기'를 출범하고 주요 권력기구의 세대교체를 단행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스포츠광·동병상련 처지…최고지도자의 공통점
남시베리아 투바공화국서 휴가 중 낚시하는 푸틴. [EPA=연합뉴스]

남시베리아 투바공화국서 휴가 중 낚시하는 푸틴. [EPA=연합뉴스]

장기집권의 길을 다진 김 위원장과 푸틴 대통령은 32살의 나이 차가 무색하게도 닮은 점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게 스포츠 취미다.
 
러시아 국기인 삼보와 유도 유단자인 푸틴 대통령은 아이스하키, 스키, 낚시, 승마를 즐기며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 위원장은 소문난 농구광이다. 스위스 유학 시절부터 미국프로농구(NBA) 경기를 자주 시청한 것으로 알려진 김 위원장은 NBA 스타 출신 데니스 로드먼과 여러 차례 만나 친분을 쌓았다. 마식령에 대규모 스키장을 건설하는 등 스키에 대한 애호도 각별하다.
 
두 정상이 국제사회의 제재로 고립된 동병상련의 처지라는 것도 공통점이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 병합으로 미국과 유럽의 제재를 피하지 못했고 김 위원장은 핵개발로 인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미국 등의 초강력 제재를 받고 있다.
 
김지혜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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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의 명곡 '돈 스톱 미 나우'가 청소년유해매체물이라고?

전설적인 록밴드 '퀸'의 전 보컬 프레디 머큐리. [중앙포토]

전설적인 록밴드 '퀸'의 전 보컬 프레디 머큐리. [중앙포토]

 
영국 록밴드 퀸의 '돈 스톱 미 나우(Don’t Stop Me Now)'는 과연 청소년 정서에 유해한 노래일까.

방심위, 노래 내보낸 KBS '불후의 명곡'에 권고 조치
'엑스터시''섹스머신'가사에 8년전 청보위,유해물 결정
12세관람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형평성도 도마
전문가들 "대중의 상식과 눈높이 맞는 심의 해야" 지적


퀸의 음악을 대표하는 명곡 중 하나이자, 몇해 전 들으면 기분 좋아지는 팝송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이 노래의 '유해성' 논란이 일고 있다.    
발단은 지난 2월 23일 방송된 KBS '불후의 명곡-전설을 노래하다' 퀸 특집에서 가수 김종서가 '돈 스톱 미 나우'를 부른 것에 대해 한 시청자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이하 방심위)에 민원을 제기한 것이다.    
'청소년들도 보는 주말 저녁시간대에 어떻게 19금 노래를 내보낼 수 있느냐'가 민원내용의 골자였다.     
방심위는 이에 대해 심의한 결과, 최근 KBS '불후의 명곡'에 행정지도인 '권고' 결정을 내렸다. 가장 미약한 수준의 처분이긴 하지만, '돈 스톱 미 나우'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결정·고시된 노래인만큼 향후 이 노래가 다시 전파를 타지 않도록 유념하라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KBS2 '불후의 명곡' 퀸 특집에서 '돈 스톱 미 나우'를 부르는 가수 김종서. [사진 KBS]

KBS2 '불후의 명곡' 퀸 특집에서 '돈 스톱 미 나우'를 부르는 가수 김종서. [사진 KBS]

 
방심위 관계자는 "시청자 민원이 제기된 이상 노래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노래가 여성가족부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청보위)에 의해 청소년유해매체물로 지정돼있기 때문에 이를 방송한 프로그램에 주의 조치를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돈 스톱 미 나우'를 청소년유해물로 분류한 청보위의 기준을 따랐을 뿐이란 설명이다.  
그러면 애초에 청보위는 왜 이 노래에 19금 딱지를 붙였을까. 이 노래가 청소년유해물이 된 건 꽤 오래전 일이다. 
2011년 당시 청보위 심의위원들은 'I’m floating around in ecstasy' (나는 황홀함에 싸여 떠다니지) 'I am a sex machine ready to reload' (나는 재장전될 준비가 돼있는 섹스머신) 등의 가사가 선정적이란 이유로 노래를 청소년유해물로 지정했다. 엑스터시가 마약의 한 종류이고, 성행위를 뜻하는 '섹스'라는 단어까지 나온 이상 청소년들에게 이 노래를 듣게 해선 안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ecstasy가 원래 '황홀함'이란 뜻이고, sex machine의 의미가 '섹시한 사람'이란 점은 고려하지 않았다.  

여가부 관계자는 "노래의 전체 맥락을 봐야 하지만, 구체적인 단어 하나에도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게 음반심의의 현실"이라며 "당시 심의위원들은 주로 구체적인 단어를 보는 외국곡 심의 패턴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가 열창하고 있다.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프레디 머큐리(라미 말렉)가 열창하고 있다.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한 장면. [사진 이십세기폭스 코리아]

 
하지만 지나치게 보수적인 관점에서 행해진 예전 심의기준이 지금까지 유지되는 건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노래를 둘러싼 변화된 세태, 듣는 이들의 의식변화 등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국 '구시대적' 기준이 돼버린다는 것이다.  
'돈 스톱 미 나우'는 지난해 말 전국을 강타한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 덕에 싱어롱 상영관에서 수도 없이 '떼창'으로 불려졌고, 가사 논란에 상관없이 삶에 지치고 소외된 이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주는 노래가 됐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돈 스톱 미 나우'가 청소년유해물이란 판정에 대해 상식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며 "시적 허용을 담은 노래 가사를 단어 몇 개를 갖고서 기계적으로 심의하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음악이란 원작자의 의도보다도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정서가 더 중요하다"며 "이런 부분을 반영해야 대중의 상식과 눈높이에 맞는 심의를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청보위는 '사람을 죽였다'(Mama, just killed a man Put a gun against his head, pulled my trigger, now he’s dead)는 가사를 담은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경우, 살해한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프레디 머큐리 자신의 자아(自我) 또는 남성성이라는 '콘텍스트'적 해석을 달아, 청소년유해물로 지정하지 않았다. 단어 몇 개의 선정성을 들어 '빨간' 딱지를 붙인 '돈 스톱 미 나우'와는 너무나 다른 심의 기준이란 지적이다.  
영화·라디오·광고 등 다른 매체들과의 형평성도 도마에 올랐다.  
'돈 스톱 미 나우' 등 퀸의 수많은 명곡이 담긴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 대해 영상물등급위원회는 '12세 이상 관람가' 결정을 내려 수많은 청소년들이 영화를 접할 수 있었다. 8년 전 여가부 청보위와는 상반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돈 스톱 미 나우'는 영화 흥행에 힘입어, 수도 없이 라디오 전파를 탔고,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지도 오래 됐다. 결과적으로 영화·라디오의 '돈 스톱 미 나우'는 청소년에게 전혀 유해하지 않고, TV방송의 '돈 스톱 미 나우'만 유해한 음악이 돼버린 셈이다.  
여가부 또한 매체에 따라 다른 잣대에 대해 적잖이 곤혹스러워하는 눈치다. 
여가부 관계자는 "다음주 열릴 예정인 음반위원회에서 음악산업 관계자들의 의견을 들어본 뒤,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돈 스톱 미 나우'를 재심의에 올릴 것"이라며 "사회적 인식과 문화적 수용력의 변화에 따라 노래가 더 이상 유해하지 않다고 판단될 경우 유해물 결정을 취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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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난 홀어미가 버린 자식도 잘 살 수 있다, 어떻게?

기자
권도영 사진 권도영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33)
잔인한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챙기느라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뉴스1]

잔인한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을 챙기느라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은 어버이날인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의 한 무료급식소에서 한 자원봉사자가 어르신에게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는 모습이다. [뉴스1]

 
매혹적인 라일락, 등나무 꽃향기와 함께 어김없이 5월은 돌아왔다. 4월보다 더 잔인할지 모를 5월이다. 어린이날을 치르느라, 어버이날을 챙기느라, 부모는 부모 대로 자식은 자식 대로 지갑 사정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부모와 자식 챙기기도 바쁜데 배우자의 부모와 형제자매의 자식들까지 포함하면 가정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예전 같으면 스승의 날까지 한몫했을 텐데 부정청탁방지법이 생기면서 그나마 그쪽 부담은 줄어 다행이다.
 
그러나 이 투정 속에서도 막상 챙겨야 할 부모나 자식조차 없는 사람은 또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슨 날일수록 막강한 힘을 드러내는 ‘4인 정상가족’의 신화는 그 범주 안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날카로운 화살을 날린다.
 
인간의 심리나 정신을 다루는 분야에서도 부모와 자녀의 구도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라고 여긴다. 부모 중 어느 한쪽이 부재하거나 힘이 약해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할 경우 부성 혹은 모성의 결핍으로 인해 인간의 정상적인 발달에 불균형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파악한다.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이처럼 ‘정상적인’ 가족 형태의 붕괴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 옛이야기에서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루는 자료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분명 가족은 인간의 삶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그럼 우리 이야기들은 부모의 결핍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 소개하는 이야기는 홍도십경(紅島十景) 중 제6경 ‘슬픈여’에 관련된 전설이다.


바다에 빠져 죽은 부모 부르다 바위 된 ‘슬픈여’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슬픈여 바위. 일곱 남매가 부모를 부르며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차례로 굳어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사진 국립공원공단]

다도해해상국립공원 슬픈여 바위. 일곱 남매가 부모를 부르며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차례로 굳어 바위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이 있다. [사진 국립공원공단]

 
아주 옛날 마음씨 고운 부부가 일곱 남매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어느 해 명절을 맞아 제물과 아이들의 새 옷을 사기 위해 뭍으로 나갔다. 일곱 남매는 산봉우리에 올라가 부모가 탄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심한 돌풍이 일어 큰 파도가 배를 덮치는 장면을 보고 말았다. 일곱 남매는 부모를 부르면서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가 차례로 굳어 바위로 변했다. 그 바위가 슬픈여 또는 일곱 남매 바위라 불린다.
 
이 서사는 부모가 이 세상에 없다면 더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일곱 남매의 좌절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지 부모가 있다는 것만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는 매우 살벌한 서사가 등장하기도 한다.
 
홀어미가 아들 형제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아이들 글공부를 가르치려고 독선생을 들여앉혔다가 욕정을 품게 되었다. 선생도 자꾸 들이대는 홀어미를 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받아주고 있었는데 홀어미는 어느 날 선생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아들 둘을 죽여 버리고 둘이서 어디 멀리 도망가서 살자는 것이었다.
 
독선생이 괴로워하는 사이 홀어미는 사냥꾼에게 돈을 많이 주고 청부살인을 모의한 후 아이들에게는 산에 가서 진달래를 따 먹으며 놀다 오라고 내보냈다. 사냥꾼은 적당한 곳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쏘려고 했지만 도저히 아이들에게 총구를 맞출 수가 없어 헛방만 날리고 말았다.
 
사실 큰아들은 엄마가 하는 말을 엿듣고 상황을 대강 알고 있었기에 사냥꾼 앞에 나서며 자기를 그냥 쏘라고 했다. 사냥꾼은 뒷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도망가라고 하며 아이들을 보내주었다. 형제는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서면서 15년 후에 아버지 묘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부지런하고 똘똘했던 형은 서울 부잣집에 데릴사위로 가게 되어 형편이 풀렸지만, 동생은 그저 얻어먹으면서 고생고생했다. 그러다 형과 약속했던 재회의 날에 제사상을 차릴 것만 겨우 장만해 아버지 묘 앞에 가 형을 기다리다가 추위에 쓰러졌다. 형은 약속 날짜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날 밤늦게야 부랴부랴 아버지 묘에 가 쓰러져 있던 동생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얼어 죽어 가던 동생은 몸이 녹자 살아났고 형은 동생을 좋은 데로 장가보내고 함께 잘 살았다.
 
엄마에게 버림을 받은 아들 형제는 안 겪어도 좋았을 험난한 삶을 살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잘 견뎌내고 좋은 결과를 얻게 됐다. 딸이라고 자식을 내버렸던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 대왕이나 부모덕이 아닌 자기 복에 산다고 대답하는 셋째딸을 내쫓았던 부자 아버지도 모두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다.
 
바리공주. 딸이라고 자식을 내버렸던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 대왕이나 부모덕이 아닌 자기 복에 산다고 대답하는 셋째딸을 내쫓았던 부자 아버지도 모두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다. [중앙포토]

바리공주. 딸이라고 자식을 내버렸던 바리데기의 아버지 오구 대왕이나 부모덕이 아닌 자기 복에 산다고 대답하는 셋째딸을 내쫓았던 부자 아버지도 모두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경우다. [중앙포토]

 
그런데 우리 옛이야기에서는 부모 없으면 못 산다고 따라 죽는 자식보다는, 자식을 내쫓거나 심지어 죽이려는 부모가 있어도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많다.
 
아버지나 어머니 어느 한쪽이 부재하다고 해서 부성이나 모성, 혹은 남성성이나 여성성이 결핍돼 문제가 생겼다고 하기는 어려운 서사가 있다. 부모 없는 사람이 나무를 깎아 부모상을 만들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드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도 있다. 없으면 만들기라도 한다는 태도와 다른 방식의 의존이라고 볼 수 있겠다.


부모 도움 없이 스스로 살아가는 주체적 인생들
부모의 영향력에 휘둘리기보다 자신의 힘과 능력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정상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라야 한 인간으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가족만이 살아갈 힘이고 가족만이 안전한 은신처라는 생각이 사실은 정말 의존적이고 완고한 사유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방질에 미친 어머니를 두었던 가엾은 형제처럼 부모 노릇 제대로 하지 못하는 부모를 뒀다면 가족 밖에 있는 사람의 도움을 통해 해결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가족 범주 안에 묶어 놓고 관망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어려움을 사회 공동체가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고가 더욱 요구되는 일이 지금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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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시댁'에 남편은 '처가'에 간다…이런 말도 성차별

기자
손민원 사진 손민원
[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이야기(23)
과거 학급 번호의 경우 당연히 남학생부터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 문화에 대해 2005년 국가 인권위원회는 여학생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각급 학교에 시정을 요구했다. [뉴스1]

과거 학급 번호의 경우 당연히 남학생부터 시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러한 학교 문화에 대해 2005년 국가 인권위원회는 여학생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각급 학교에 시정을 요구했다. [뉴스1]

 
반장은 당연히 남학생이었던 때도 있었고, 학급 번호 1번은 당연히 남학생이 차지하는 시절도 있었다. 관습적으로 내려오던 이러한 학교 문화에 대해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는 ‘남학생에게만 앞번호를 부여하는 관행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여학생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행위’라며 각급 학교에 시정을 요구했다.
 
그 이후 대부분의 학교가 이름의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서울의 한 초등학교가 남학생은 1번부터, 여학생은 50번부터 출석번호를 지정한 학부형이 차별 행위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접수했다고 한다.
 
또 한편에선 주민등록번호에서 뒷자리 중 첫 번째 숫자를 성별에 따라 부여하는 것은 성차별이라는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현재 1900년대 출생자의 경우 남자에게는 ‘1’이, 여자에게는 ‘2’가 각각 부여되고, 2000년대 출생자에게는 남자 ‘3’, 여자 ‘4’가 부여된다. 남성에게 모두 빠른 번호가 주어지고 있다. 이 또한 남성을 우선시하는 사고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숫자로 남자가 앞인 게 성차별과 무슨 연관이 있느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말 속에는 관계와 권력이 표현된다. 이는 한 번의 호칭으로, 한마디의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소통과 관계가 지속되다 보면 그 사회의 문화로 형성된다.
 
만약 오늘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를 ‘한일전’이라고 말하지 ‘일한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일한전’은 우리에겐 너무나 생소한 단어다. 또 ‘남북 정상회담’이란 말은 당연하게 들리지만 ‘북남 정상회담’은 낯선 용어처럼 들린다. 이렇듯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만들고 문화를 생성한다.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를 '한일전'이라고 하지 '일한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듯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만들고 문화를 생성한다. [중앙포토]

한국과 일본이 축구 경기를 한다고 했을 때 우리는 이를 '한일전'이라고 하지 '일한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렇듯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만들고 문화를 생성한다. [중앙포토]

 
혐오 부추기는 차별 언어 
현재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생물학적 성이냐에 따라, 나와 다른 세대냐에 따라, 나와 다른 지역 출신이냐에 따라, 어떤 성별 정체성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노골적으로 차별을 넘어 혐오의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청소년은 1인 BJ의 자극적이고 차별적인 말을 그대로 습득하고 재미있다고 따라 하고 있다.
 
혐오의 말이 누군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다. 차별 언어는 나와 다른 차이를 이유로 명시적 또는 암묵적으로 편을 나누고, 다른 편에는 부정적이고 공격적 태도를 드러내게 한다. 차별 언어는 대부분 이 사회의 소수자인 장애인, 여성, 청소년, 난민, 성 소수자를 향한다. 
 
차별 언어는 대립과 갈등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후에는 대립과 갈등을 더 부추기고 혐오까지도 만들어낸다. 혐오 표현은 단순히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을 넘어 나와 타인을 분리하고 배제하며 그 대상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낙인을 찍는다.
 
그럼 불평등을 고착화하는 혐오의 표현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대표적인 혐오 표현 중 하나가 여성을 비하하는 뜻을 내포한 ‘김치녀’, ‘된장녀’, ‘맘충’, ‘김여사’ 등이다. 이에 맞서 한국 남성에 대한 비하의 용어로 ‘한남충’이 쓰이고 있다. 한국 사회는 가부장제의 유교적 사상이 강하므로 오랜 관습에 따른 남존여비의 잔재가 우리 일상 언어에 뿌리 깊이 자리하고 있다.
 
성차별적 호칭을 살펴보면 남편이 다른 사람 앞에서 아내를 지칭할 때 ‘집사람’ ‘안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에는 여성은 주로 집에서 일하는 사람,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결혼하고 나면 남편은 아내의 여동생에겐 ‘처제’, 남동생에겐 ‘처남’이라는 호칭을 쓴다. 같은 논리라면 여성 또한 남편의 여동생에겐 ‘부제’, 남동생에겐 ‘부남’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런데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른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은 설 명절을 맞아 성차별적 호칭을 개선하자며 새로운 표현 7개를 제시했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9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504명을 대상으로 가족 호칭의 성 차별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남성보다 여성이 '성차별적이다'는 인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은 설 명절을 맞아 성차별적 호칭을 개선하자며 새로운 표현 7개를 제시했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9일 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504명을 대상으로 가족 호칭의 성 차별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남성보다 여성이 '성차별적이다'는 인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뉴시스]

 
반면에 설날에 아내는 ‘시댁’을 가야 하지만 남편은 ‘처가’에 간다. 남편 가족에게는 존칭을, 아내 가족에게는 하대하는 문화가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외할아버지의 호칭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에겐 왜 바깥 외(外)자를 굳이 붙여야 할까?
 
‘남녀 사이’, ‘남존여비’, ‘남남북녀’ 모두 남성이 앞이다. ‘연놈’, ‘어미아비’ 같은 욕설은 왜 그 반대일까. ‘처녀작’, ‘처녀비행’은 어떨까? 여기에서 ‘처녀’의 의미는 여성의 순결성을 강조하는 남성 중심의 문화가 드러나는 차별적인 용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첫 작품과 첫 비행으로 명명할 수 있겠다.
 
이제 직업군에 대한 명칭을 살펴보자. 여성의 직업에는 왜 꼭 ‘여’자가 붙는 것일까? ‘여류화가’, ‘여의사’, ‘여배우’, ‘여군’은 그냥 화가, 의사, 배우, 군인으로, ‘남자 간호사’도 간호사로 불러야 한다.
 
또 장애인을 비하하는 수많은 언어가 존재한다. 장애인을 빗대어 오랫동안 사용돼 온 속담과 관용어도 있다. ‘눈뜬장님’, ‘꿀 먹은 벙어리’, ‘귀머거리 삼 년’ ,‘절름발이 정책’ 등이 그 예다. 실제로 장애인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쓰이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표현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강화하는 것이므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벙어리장갑’은 엄지 장갑으로, ‘장애우’는 장애인으로, ‘정신분열’은 조현병으로, ‘정신지체’는 지적장애란 표현으로 사용해야 한다.
 
여성 대다수 일상 속 호칭 변경 원해 
국민권익위원회와 국립국어원이 ‘일상 속 호칭 개선 방안’에 대해 8000여 건의 국민 의견을 분석한 결과 여성은 대다수가, 남성도 절반 이상이 일상 속 호칭을 바꾸자고 대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익숙한 나의 언어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면 내가 하는 일상의 언어부터 스스로 검열해 보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과거 많은 여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은 '순결, 정숙, 배려, 겸손'이었고, 남학생의 급훈은 '단결, 용기, 명예, 열정'이었다. 아직도 많은 학교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규범 안에 급훈이나 교훈, 교가를 규정한다. [뉴스1]

과거 많은 여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은 '순결, 정숙, 배려, 겸손'이었고, 남학생의 급훈은 '단결, 용기, 명예, 열정'이었다. 아직도 많은 학교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규범 안에 급훈이나 교훈, 교가를 규정한다. [뉴스1]

 
과거 많은 여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은 순결, 정숙, 배려, 겸손이었고, 남학생의 급훈은 단결, 용기, 명예, 열정이었다. 학생들은 이 급훈과 교가를 되뇌며 성장하는데, 아직도 많은 학교의 급훈이나 교훈‧교가는  여성성‧남성성의 규범으로 제작됐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 60년 전통을 지닌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교가를 바꾼 사례를 접하게 되었다. 이 고등학교의 교가 후렴부엔 ‘여자다워라!’라는 가사가 반복되었는데, 이 부분을 학생들의 의견 수렴을 통해 ‘지혜로워라’로 바꾸는 과정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내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작은 언어에 질문을 던지고 바꾸어 나간 좋은 예라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에겐 표현의 자유가 있지만 상대방을 비방하고 존엄을 깎아내리는 표현의 자유까지는 허락되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는 것은 무엇이든 허용한다는 뜻이 아니다. 어떤 집단에서 잘못을 한 사람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집단을 묶어 ‘○○녀’, ‘○○충’으로 묶어 그 집단 전체를 혐오하는 것은 옳지 않다. 
 
차별이나 혐오의 언어는 말하는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듣는 사람에겐 칼 같은 무기가 되고, 또다시 재생산돼 혐오를 공고하게 확산시킨다. ‘○○충’이 많아진다는 것은 결국 배제의 대상이 많아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나 또한 혐오의 대상에서 무관하지 않다.
 
손민원 성·인권 강사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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